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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의눈물" 에 얽힌 일화 한 토막 ... 1934년 조선일보사는, 日帝의 갖은 탄압속에서 위협받던 우리 민족의 고유정서를 북돋우기 위한 문화사업의 하나로, OK 레코드와 손잡고 향토 노래가사를 공모했고, 여기서 목포의 무명시인 문일석(本名 윤재희)의 작품 "목포의 노래" 가 3천여편의 응모작 중 영예의 1등으로 당선된다. 애절한 이별의 한을 담은 이 "목포의 노래"를 OK 레코드 사장 이철은 "목포의 눈물" 로 제목을 바꾸어 손목인에게 작곡을 의뢰, 목포 출신의 어린 가수인 이난영이 부르게 된다. 이난영은 1916 년 여름 목포 앞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양동 42번지 속칭 양동 6거리의 산동네 초가집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북교초등학교 4학년을 끝으로 어머니가 살고있는 제주도로 간다. 어머니가 일하는 일본인 집에서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보는 일을했다. 극장을 경영하며 부유했던 이 집에서 난영은 생전 처음 축음기를 보게된다. 천부적으로 노래를 좋아했던 난영은 귀동냥으로 들었던 음악을 축음기 소리에 그대로 흉내 내 흥얼거렸다. 이런 난영의 노랫소리를 듣게 된 집주인이 자신의 극장에 온 순회 악극단에 소개하여 일명 "막간 가수"로 얼굴을 내밀게 된다. 12살짜리 어린 소녀 가수였다. 1932년 16세 되던 해, 삼천리 가극단 단장이 난영을 무대가수로 키우겠다며, 즉석에서 특별단원으로 채용한다. 반년후. 재일 한국인 (在日朝鮮人) 위문공연차 일본원정을 떠나는 삼천리 가극단에 섞여 일본의 오오사카에 도착했고, 우연히 당시 흥행계의 거물 OK 레코드 사장인 李哲의 눈에 띄게된다. 그는 난영을 작곡가 손목인에게 소개시켰고, 그녀에 맞는 곡을 준비하도록 부탁했다. 그리고, 이옥례라는 본명 대신 난영이라는 예명과 함께..... "어린 모습이긴 하나 고귀한 자태를 지닌 난초와 같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목포의 눈물" 은 음반이 출시 되자마자 히트 했고, 우리 가요로서는 최초로 일본어로 취입되어 일본에서도 큰 인기를 얻게된다. 일제 강점기 시절... 民族의 恨을 노래한 "망향가" 이며, 해방 후에는 설움받는 사람들의 "시름가" 이기도 했던 목포의 눈물... 그 암울했던 시절, 난파의 "봉선화"가 우리의 혼을 달랬다면, 유행가로 우리의 심금을 울렸던 노래가 바로 "목포의 눈물" 이라 할 것이다. |
목포-그리움이멈추는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