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작가 초성 김우진(焦星 金祐鎭)
김우진은 1897년(정유년) 9월 19일 당시 장성 군수였던 부친 김성규와 어머니 순천 박씨 사이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1926년 8월 4일 오전 4시경 일본 시모노세끼(下關)를 떠나 부산으로 향하던 도꾸쥬마루(德壽丸)의 뱃전에서 가수 윤심덕과 함께 현해탄에서 자살했다. 29세의 짧은 나이였다.
김우진은 일찍이 보통학교 때부터 벌써 빅토르 위고를 읽고 셰익스피어, 다눈치오 등에 심취했었고 농업학교에 다니면서도 오로지 철학과 문학에 빠져들었다. 와세다(早稻田)대학 영문과에 입학한 후부터는 다눈치오를 위시해서 보들레르, 브라우닝, 하이네 등 독일과 프랑스 시인들의 작품을 탐독하여 그들로부터 서정성을 취했고, 본과인 영문과로 가서는 종합예술인 연극에 심취했다.
그리고 시작(詩作)을 계속하면서 철학ㅗ문학ㅗ연극 등 다방면에 걸친 각종 서적을 광범위하게 섭렵함으로써 서구의 철학 및 문학사상을 섭취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일찍 근대사상에 눈뜨게 되었다. 그의 철학사상은 주로 칸트ㅗ헤겔ㅗ쇼펜하우어ㅗ니체ㅗ마르크스 등에서 영향을 받아 합리적이고 냉철한 서구적 교양과 인격을 갖추게 되었다.
김우진의 본격적인 비평활동은 [소위 근대극에 대하야] (『학지광』, 1921. 6.)에서 시작되어 자살 직전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1920년 동경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극예술현회]를 조직하여 문학 전반에 관한 전문적 지식을 습득했다.
즉 매주마다 회원들이 모여 독서ㅗ토론 및 연극감상 등을 하면서 문학ㅗ연극ㅗ문학에 관한 전문적인 소양을 쌓아갔다. 주요 회원은 김우진과 조병희를 비롯한 20여 명이다.
또한 이 단체는 1921년 7∼8월 사이의 여름방학 기간에 모국에서 동경 거주 고학생ㅗ노동자들의 친선 모임인 동우회(同友會)의 회관 건립을 위한 기금모금 순회연극단의 주축이 되었다. 동아일보의 후원으로 박세희의 인솔하에 약 한 달 동안 부산ㅗ김해ㅗ마산ㅗ경주ㅗ대구ㅗ서울ㅗ평양ㅗ진남포ㅗ원산 등지에서 공연을 갖고 종로 YMCA 회관에서 해산식을 거행했다.
이때의 공연작품은 조병희의 [김영일의 사(死)]와 홍난파 소설 [최후의 악수]를 2막으로 각색학 작품, 그리고 김우진이 아일랜드의 던세이니경 원작 [찬란한 문](1막)을 번역한 작품이다.
대학 졸업 후 목포에 귀향해서는 1925년 문학동인회 'Socie Mai'를 조직, 활동하였다.
김우진은 일찍이 어린 나이인 16세 때 소설 [공상문학]을 탈고했다. 1913년 6월에 창작된 이 작품은 원고지 150매 정도의 단편소설 규격을 완벽히 갖춘 작품으로 이탈리아의 민족시인 다눈치오(1863∼1938)의 [죽음의 승리]와 유사한 데가 있는 소설이다.
습작활동을 통해 문학을 향한 자신의 열정을 표출시켜 오던 그는 대학 진학 후 1920년부터 1926년 8월 사망하기까지, 창작 희곡 5편, 시 48편, 번역 3편, 연극 및 문학비평 10편, 그리고 논문 6편, 일기, 서간문, 수필 등을 남겼다.
그의 문학사적 업적을 살펴보면 주요한 이전에 벌써 근대시를 실험했고(미발표고), 20년대 초 체계적인 이론을 바탕으로 비평계의 무잡성을 매도했으며, 어느 작가보다 먼저 근대극다운 희곡작품을 썼을 뿐 아니라, 서구를 풍미했던 표현주의 문학사조를 받아들여 문단에 소개함으로써 우리 문학사상 최초며 최후의 표현주의 작가로 기록되고 있다.
표현주의적 희곡작품으로는 [정오] [이영녀] [두더지 시인의 환멸] [난파] [산돼지] 등이 있다.
김우진은 서두에서 밝혔듯이 1926년 8월 4일 오전 4시경 일본의 시모노세끼를 떠나 부산으로 향하던 관부연락선 도꾸쥬마루가 대마도 옆을 지날 즈음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했는데 당시 승선 명부에는 전남 목포부 북교동 김수산(金水山)(30세)으로 기록 되어 있었고 유품으로는 현금 20원과 금시계 1개였다. 함께 자살한 여자는 경성부 서대문정 2정목 173번지 윤수선(尹水仙)(30세)(가수 윤심덕)으로 유품은 돈 지갑에 현금 140원과 장식품이었다.
당시 동아일보(1926. 8. 5일자)는 이 사건으로 '연락선에서 조선 사람이 정사한 것은 처음'이라고 당시 상황을 자세히 보도하고 김우진이 경성의 조명희에게 동경에서 보낸 마지막 편지까지 공개하는 등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그뒤에도 다섯 차례에 걸쳐 독자들의 여론과 함께 큰 관심을 보였다.
김우진의 추도회가 1926년 9월 16일 오후 8시 친구들의 발기로 목포 청년회관에서 개최되었다
김우진은 1897년(정유년) 9월 19일 당시 장성 군수였던 부친 김성규와 어머니 순천 박씨 사이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1926년 8월 4일 오전 4시경 일본 시모노세끼(下關)를 떠나 부산으로 향하던 도꾸쥬마루(德壽丸)의 뱃전에서 가수 윤심덕과 함께 현해탄에서 자살했다. 29세의 짧은 나이였다.
김우진은 일찍이 보통학교 때부터 벌써 빅토르 위고를 읽고 셰익스피어, 다눈치오 등에 심취했었고 농업학교에 다니면서도 오로지 철학과 문학에 빠져들었다. 와세다(早稻田)대학 영문과에 입학한 후부터는 다눈치오를 위시해서 보들레르, 브라우닝, 하이네 등 독일과 프랑스 시인들의 작품을 탐독하여 그들로부터 서정성을 취했고, 본과인 영문과로 가서는 종합예술인 연극에 심취했다.
그리고 시작(詩作)을 계속하면서 철학ㅗ문학ㅗ연극 등 다방면에 걸친 각종 서적을 광범위하게 섭렵함으로써 서구의 철학 및 문학사상을 섭취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일찍 근대사상에 눈뜨게 되었다. 그의 철학사상은 주로 칸트ㅗ헤겔ㅗ쇼펜하우어ㅗ니체ㅗ마르크스 등에서 영향을 받아 합리적이고 냉철한 서구적 교양과 인격을 갖추게 되었다.
김우진의 본격적인 비평활동은 [소위 근대극에 대하야] (『학지광』, 1921. 6.)에서 시작되어 자살 직전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1920년 동경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극예술현회]를 조직하여 문학 전반에 관한 전문적 지식을 습득했다.
즉 매주마다 회원들이 모여 독서ㅗ토론 및 연극감상 등을 하면서 문학ㅗ연극ㅗ문학에 관한 전문적인 소양을 쌓아갔다. 주요 회원은 김우진과 조병희를 비롯한 20여 명이다.
또한 이 단체는 1921년 7∼8월 사이의 여름방학 기간에 모국에서 동경 거주 고학생ㅗ노동자들의 친선 모임인 동우회(同友會)의 회관 건립을 위한 기금모금 순회연극단의 주축이 되었다. 동아일보의 후원으로 박세희의 인솔하에 약 한 달 동안 부산ㅗ김해ㅗ마산ㅗ경주ㅗ대구ㅗ서울ㅗ평양ㅗ진남포ㅗ원산 등지에서 공연을 갖고 종로 YMCA 회관에서 해산식을 거행했다.
이때의 공연작품은 조병희의 [김영일의 사(死)]와 홍난파 소설 [최후의 악수]를 2막으로 각색학 작품, 그리고 김우진이 아일랜드의 던세이니경 원작 [찬란한 문](1막)을 번역한 작품이다.
대학 졸업 후 목포에 귀향해서는 1925년 문학동인회 'Socie Mai'를 조직, 활동하였다.
김우진은 일찍이 어린 나이인 16세 때 소설 [공상문학]을 탈고했다. 1913년 6월에 창작된 이 작품은 원고지 150매 정도의 단편소설 규격을 완벽히 갖춘 작품으로 이탈리아의 민족시인 다눈치오(1863∼1938)의 [죽음의 승리]와 유사한 데가 있는 소설이다.
습작활동을 통해 문학을 향한 자신의 열정을 표출시켜 오던 그는 대학 진학 후 1920년부터 1926년 8월 사망하기까지, 창작 희곡 5편, 시 48편, 번역 3편, 연극 및 문학비평 10편, 그리고 논문 6편, 일기, 서간문, 수필 등을 남겼다.
그의 문학사적 업적을 살펴보면 주요한 이전에 벌써 근대시를 실험했고(미발표고), 20년대 초 체계적인 이론을 바탕으로 비평계의 무잡성을 매도했으며, 어느 작가보다 먼저 근대극다운 희곡작품을 썼을 뿐 아니라, 서구를 풍미했던 표현주의 문학사조를 받아들여 문단에 소개함으로써 우리 문학사상 최초며 최후의 표현주의 작가로 기록되고 있다.
표현주의적 희곡작품으로는 [정오] [이영녀] [두더지 시인의 환멸] [난파] [산돼지] 등이 있다.
김우진은 서두에서 밝혔듯이 1926년 8월 4일 오전 4시경 일본의 시모노세끼를 떠나 부산으로 향하던 관부연락선 도꾸쥬마루가 대마도 옆을 지날 즈음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했는데 당시 승선 명부에는 전남 목포부 북교동 김수산(金水山)(30세)으로 기록 되어 있었고 유품으로는 현금 20원과 금시계 1개였다. 함께 자살한 여자는 경성부 서대문정 2정목 173번지 윤수선(尹水仙)(30세)(가수 윤심덕)으로 유품은 돈 지갑에 현금 140원과 장식품이었다.
당시 동아일보(1926. 8. 5일자)는 이 사건으로 '연락선에서 조선 사람이 정사한 것은 처음'이라고 당시 상황을 자세히 보도하고 김우진이 경성의 조명희에게 동경에서 보낸 마지막 편지까지 공개하는 등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그뒤에도 다섯 차례에 걸쳐 독자들의 여론과 함께 큰 관심을 보였다.
김우진의 추도회가 1926년 9월 16일 오후 8시 친구들의 발기로 목포 청년회관에서 개최되었다
출처 : 늘복의 집
글쓴이 : 늘복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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