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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그리움이멈추는곳

전라남도에서 최초로 기독교 문화를 접한 지역-목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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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칭 : 양동교회
◆ 소재지 : 목포시 양동 127번지
◆ 제작연대 : 1910년

목포에 처음 선교사가 다녀 간 것은 1894년 4월 18일에 드루(유대모)라고 하는 선교사가 여행 중에 목포에 들려 선창가 장터에서 상인들을 상대로 첫 전도활동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이후 목포가 개항 될 것이라는 것이 소문이 나면서부터 선교사들이 목포에서 본격적인 전도활동을 하게 되는데, 1897년 3월 5일 선교사 유진 벨이 지금의 목포시 양동에 교회를 세운 것이 그 시초다.
목포는 지리적 특성상 내륙과 도서지역을 오가면서 선교활동을 하기에 유리한 위치에 해당하기 때문에 서남부 지역의 기독교의 중심지역이 되었는데, 이 중심교회가 바로 목포 최초의 교회인 양동교회라고 하겠다.
양동의 언덕에 천막을 두르고 처음 시작한 이 교회는 그 이듬해인 1898년 6월 10일경에 첫 번째 예배당을 지었다고 하며, 그 후 신도수가 늘어나 1900년 가을에 한식 와가 한채와 14평 남짓 한 교회당을 근접지에 다시 신축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양동 127번지의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는 양동교회 건물은 계속해서 늘어나는 신도를 수용하기 위해서 1910년에 건축한 것이다.
목포는 1897년 개항과 함께 많은 근대문물이 유입되면서, 도시로서 급속한 성장을 거듭하게 되는데, 그 중 기독교선교사들의 역할도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물론 외래종교의 유입이나 선교사의 활동이 모두 긍정적인 결과만 주는 것은 아니다. 전통문화의 파괴라든가 제주도의 이재수란과 같은 경우 지역민 사이의 갈등이 조장되는 사례도 볼 수 있는데, 목포는 전통적인 보수세력이나 토착세력의 형성이 매우 약한 곳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부작용은 비교적 적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선교사들의 활동은 기독교의 전파와 함께 각종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병행함으로서, 이 지역이 근대도시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촉진제 노릇을 하였고, 목포양동교회는 그러한 활동의 중심무대였다. 단순히 목포 최초의 교회였다는 의미 외에도 목포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의미 있는 장소라고 하겠다.
특히 목포지방은 전라남도에서 최초로 기독교 문화를 접한 지역이다. 이로 인해 일찍이 근대화 서양문명을 접할 수 있었으며, 한글교육을 통한 문맹타파, 여성해방운동이나 신분차별 폐지 등 근대적인 사상이 보급되는데 기여했다고 평가 할 수 있겠다.


선교사의 의료활동과 교육활동

선교사들이 해당지역의 주민들과 친숙해지는 방법은 종교적인 접근보다는 의료나 교육을 통한 방법이 더 효과적이다. 목포에서도 마찬가지로 의료시설이나 학교설립을 통한 선교가 지역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는데, 1898년 오원이라는 의료선교사가 목포에 부임하면서부터 목포에 처음으로 의료진료소가 설립이 되고, 치료를 해주면서 선교를 하는 이른바 의료선교가 활성화된다. 이러한 목포의료원이 점점 확대되면서 1914년에는 프렌치 기념병원으로 2층 석조건물을 신축하여 정식병원으로 탄생한다.
교육분야에서 보면 1903년 미션스쿨이라고 할 수 있는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가 설립이 되는데 교육시설의 결핍을 이 두 학교가 어느 정도 채워주었다고 할 수 있고, 또한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이 학교들은 교육이나 사상면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공립보통학교는 일본인 교장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기 때문에 민족운동이 억압될 수밖에 없었던 반면 사립학교인 기독교학교에서는 교사들에 의한 민족정신 주입이 비교적 용이하였기 때문에 목포의 3.1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4.8만세운동이나 이후 목포의 항일운동에 이 두 학교 출신들이 앞장서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목포: KY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