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칭 : 구 목포청년회관(현 목포 제일교회) ◆ 소재지 : 목포시 남교동 80-1 ◆ 제작연대 : 1925년 ◆ 분류 : 근대문화유산 등록 ◆ 지정년도 : 2002년
현 신안군청에서 우측으로 조금만 내려오면 왼편으로 난 골목길 사이로 임마누엘 제일교회라고 하는 작은 교회 하나가 눈에 들어오는데, 이곳이 바로 옛 목포청년회관(목포시 남교동 80-1) 건물이다. 예전에 원진극장건물이 있었던 곳 바로 옆인데, 당시 1920년대 목포청년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목포청년회에서 숙원사업으로 1924년 4월부터 회관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을 통해 남교동 땅 1백평을 대지로 사들였고, 건평 57평의 석조건물을 9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1925년 3월 낙성식을 가졌는데 다행히도 이 건물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이시기 목포청년회관은 일개인의 집이 아닌 목포청년들의 지덕함양과 민족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잊을 수 없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1920년대 후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족운동 단체인 신간회의 목포지부 창립식이 1927년에 이곳 청년회관에서 이루어졌으며, 당시 각종 소작쟁의 운동을 해야만 했던 노동자들의 피난처이자 안식처로 활용되는 등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의 보금자리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건물자체로 볼 때는 석조 단층의 단순한 구조이고, 크게 주목되는 점이 없어서, 그동안 이 건물의 문화재적 가치가 그리 높이 평가를 받지는 못했는데, 이 건물의 가치는 외형적인 면보다 역사적인 면과 목포의 정신사적인 면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현재 문화재로 지정되어 목포에 남아 있는 근대건축물들은 대부분 일본인들의 식민정책을 위해 세운 건물들이지만, 이 건물만큼은 목포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목포사람들의 모금운동을 통해서 지어진 건물이라는 점이 더 아끼고 보존해야 할 소중한 유산임을 말해준다.
목포의 청년운동 발자취
전국적으로 각 지역의 청년운동은 1920년대에 들어서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었는데, 목포에서는 1920년 5월 9일 목포청년회가 조직되는 것을 시발점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창립총회에서 이들은 창립목적을 '지육(智育)과 체육(體育)의 향상 발달'을 도모함에 있다고 밝혔는데, 임원 구성을 보면 목포청년회는 당시 목포의 '유지' 내지는 '중산청년층'의 모임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목포청년회는 주로 계몽적인 강연회를 열었고, 노동야학회를 개설하여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활동사진대라는 것을 조직하여 동경고학생들을 돕기 위한 전국 각지 순회를 하기도 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목포 지역에는 기독청년회, 천도교청년회, 목포수양회, 목포여자수양회 등이 결성되었으며, 이들 청년단체들도 주로 강연회, 토론회, 운동회 등을 통하여 계몽활동을 펼쳤다. 192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기존의 청년운동에 대한 반성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면서 1924년 9월 사회주의적 성격을 지닌 무산청년회(無産靑年會)가 목포에도 조직되었는데, 기존의 청년회를 그대로 두고 새로운 성격의 청년회가 또 하나 조직된 것으로 그 주요구성원이 강석봉, 배치문 등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진보적 인물들이 적극 참여 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 시기부터 목포의 청년운동은 중산청년층의 목포청년회와 신진청년층의 무산청년회로 나뉘어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양자가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양립해서 지역의 청년운동을 주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1927년부터는 각계 각층을 통일한 대중적 청년운동을 전개한다는 방침하에 단일 단체인 목포청년동맹이 결성되면서 목포청년운동은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이러한 청년운동의 사랑방 역할을 목포청년회관 건물이 수행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청년연맹이 해체되고, 사회운동의 침체적 시기를 맞아 이 청년회관은 주인 잃은 건물로 한동안 방치되게 된다. 소설가 박화성 선생은 헐어진 청년회관이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해서 당시의 안타까운 상황을 묘사하기도 했다.
출처: 목포KYC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