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향기 2014. 1. 14. 23:06

 

활 / 강정

 

 

 

 

 

시간이 이 세상 밖으로 구부러졌다

시여, 등을 굽혀라

 

 

고양이 새끼가 운다

어미 고양이를 삼키고 사람이 되려고 운다

 

 

급류를 삼킨 노을이

노을이 오빠가 되려고 운다

 

 

떠돌다 지친 다리가

다른 인간의 눈이 되려고

멀고 먼 샅으로 기어올라온다

 

 

빛이 어디 있는가

뒤집어진 어둠의 골상을 판독하려

한나절의 시름이 그다지 깊었다

 

 

못 나눈 정을 전염시키려

낮 동안 오줌보는 그토록 뾰로통했다

 

 

혈관에 흐르는 오래된 문자들을

고양이의 꿈이 딛고 지나는 이마 위에 처발라라

 

 

팔다리는 공기가 멈춘 나무

낭심 아래엔 죽은 별 무더기

 

 

구부러진 어깨를 펴라

갈빗대에 힘줄을 얹어

마지막 숨을 길게 당겨라

 

 

발끝으로 세계의 끝을 밀어내고

이승 바깥에서 돌아 나오는

흰 새벽의 눈알을 찔러라

 

 

터져 나오는 세계의 명치에 구름을 띄워

이면이 없는 幻을 쳐라, 고요히 실명하라

 

 

실명하라

 

 

 

 

 

ㅡ 강정, 『활』, 문예중앙,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