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Digitopia ( 이 곳에 가시면 더 자세하게 볼 수 있습니다. )
[아그라]
- 자이프르에서 버스로 약 6시간 이동
- 이동 중 파테푸르 시크리 성 답사
- 타지마할 / 아그라 성
[아그라]
인구 약 1백20만명, 인도북부 우타르프라데시주의 서부에 위치하며 델리에서 남쪽으로 204km 떨어진 곳에 있다.
아그라는 힌두의 대서사시 “ 마하바라타 “에 천국의 정원이라는 뜻의 “ 아그라바나 “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을 만큼 오랜 역사를 지닌 곳이다. 그러나 만일 아그라에 “ 타즈 마할 [ Taj Mahal ] 이 없다면 아마도 인도의 한 평범한 도시중의 하나에 불과하였으리라.
타즈 마할을 세운 회교세력과 아그라가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501년으로 이 즈음에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한 술탄 시칸데르 로디가 이곳을 수도지로 정함으로써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무굴 [ Moghul ] 제국의 수도가 된 아그라는 아크바르로부터 샤 자한에 이르기 까지 무굴 제국이 전성기를 누리는 동안 무굴 제국의 수도로 존속해오며 인도 천하의 중심지로 군림하였었다.
무굴제국은 1558년 수도를 델리에서 아그라로 옮겨, 1564년~1574년, 10에 걸쳐 막대한 예산으로 아그라성을 건축하였는데, 사자한 왕 때 지금의 모습이 갖추어졌다. 무굴제국이 1658년 수도를 다시 델리로 옮길 때까지 약 100년간 수도로서 북부 인도를 다스리는 터전이 되었다. 영국 동인도 회사의 지배를 받을 때도 주변지 구의 행정중심지로서 그 역할을 다 하였으며, 오늘날도 지방행정부의 청사가 아그라에 있다
무굴제국은 1558년 수도를 델리에서 아그라로 옮겨, 1564년~1574년, 10에 걸쳐 막대한 예산으로 아그라성을 건축하였는데, 사자한 왕 때 지금의 모습이 갖추어졌다. 무굴제국이 1658년 수도를 다시 델리로 옮길 때까지 약 100년간 수도로서 북부 인도를 다스리는 터전이 되었다. 영국 동인도 회사의 지배를 받을 때도 주변지 구의 행정중심지로서 그 역할을 다 하였으며, 오늘날도 지방행정부의 청사가 아그라에 있다
[무굴 제국]
무굴제국은 몽고의 후손들이 세운 우즈베크 공화국에서 태어난 바부르로부터 시작한다. 바부르는 원래 인도보다 사마르칸트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티무르의 옛 영광을 되찾고 싶어했다. 하지만 두 번에 걸친 시도에서 오히려 고향까지 잃어버린 그는 차선책으로 유명한 파니파트 전쟁을 통해 당시 쇠락해 버린 델리의 로디왕조를 물리치고 무굴제국을 세운다. 바부르의 인도 진출은 인도 역사상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훌륭한 군인이며 정치인이고 동시에 예술애호가로서 시인이기도 했던 바부르는 세계역사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 중 하나인 동시에 인도 역사에서 무굴제국이라는 새 장을 탄생시킨 인물인 것이다.

바부르는 한편 인도에 새로운 전쟁의 기법을 소개했다. 대포와 같은 화기를 이용한 전술적 효과를 확연하게 입증(실지로 파니파트 전투에서 10배가 넘는 상대를 불과 3시간만에 초토화시킴)시킴으로써 코끼리를 주로 이용했던 인도권에게는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또한 뛰어난 설득력과 통솔력의 소유자로 병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페르시아어와 아랍어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모국어인 터키어 작가 가운데 가장 유명한 한 사람이었을 정도로 뛰어난 예술가였다. 그가 직접 저술한 자신의 회고록은 오늘날 세계고전 문학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수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뒤를 이은 후마윤은 선왕때 거듭된 전쟁으로 중앙집권적인 행정조직을 갖추지 못한 제국을 계승 받았다. 또한 강력한 저항세력인 아프가니스탄계를 물리치고 영토의 확장을 꾀하지만 오히려 그들에게 쫓겨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이란으로 도망간다. 후마윤을 중심으로 한 무굴인들은 비록 영토는 바부르에 의해 크게 확장되었지만 수적으로는 여전히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동생들마저 호시탐탐 형의 지위를 노리는 불안정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여기에다 결정적인 순간에 이해할 수 없는 방심을 보였던 후마윤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의 패배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도망간 사이 델리에는 후마윤을 물리친 쉐르 칸이 스스로 '쉐르(호랑이) 샤'(아프가니스탄계의 지배자라는 뜻)라고 부르면서 델리에 수르 왕조를 건립한다. 그는 짧은 기간이지만 무굴제국의 전반적인 국가조직에 중요하 토대를 제공했다. 관료조직을 정비하고, 화폐개혁을 통해 물가안정을 취하고, 토지를 측량하여 토지세 징수를 효율적으로 개선하면서 국가경제의 안정을 이루었다. 그는 북인도의 서쪽과 동쪽을 잇는 그랜드 트렁크 로드를 건설하고 여행자의 편의를 위해 8킬로미터마다 숙소를 세우기도 했다. 이같은 노력은 후예 무굴제국의 악바르에게 계승되어 제국의 기틀을 다지는데 결정적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수르 왕조는 겨우 15년만을 유지한 뒤 이란의 도움을 받은 후마윤에 의해 멸망당하고 만다.
후마윤의 뒤를 이은 악바르는 북인도 전역을 차지한 뒤 남부의 데칸 지역까지 차지하면서 마우리야 왕조 이후 가장 넓은 지역을 차지하는 국가를 이룬다. 그는 영토 확장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의 제반 분야에서도 무굴제국의 확고한 토대를 마련했고, 인재의 등용에 있어서도 힌두교도에게도 평등하게 기회를 주었다. 악바르는 델리 술탄 시대의 문제가 왕권의 약화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왕권의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해 이슬람교를 활용했다. 종교적으로도 이전의 이슬람 왕조와는 달리 이슬람 이외의 종교를 포용하는 융화책을 취하였다.
견고하고 화려한 아그라 성(Agra Fort)
1565년 무굴제국 제3대 악바르 대제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그 이후 자한길, 샤 자한에 의해 보강되어 증측되었다. 길이 2.5 km에 달하는 붉은 빛의 사암의 성벽인 아그라 성은 타지마할의 북서쪽, 야무나(Yamuna)강을 따라 만들어 졌다. 전쟁을 위한 견고한 성으로 이중으로 이루어진 굴, 이중으로 이루어진 성벽에 둘러싸여 있다. 그러나 외측에 비해서는 견고함이 대조적인 내부의 궁전은 화려함의 극치로 지어져있다.
높은 성벽을 지닌 곡선모양의 성채는 웅장한 성문인 아마르 싱(Singh)만을 위한 것으로, 지금은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있다. 원래 웅장한 아구라성 입구는 '하티폴(Hathi Pol)'혹은 '코끼리문(Elephant Gate)'라고 부르는 내부 정문으로 이어지는 델리게이트를 통해 들어 갈 수 있었다.
아그라성에서는 멀리 타지마할이 보인다. 샤 쟈한는 만년에 자식에 의해 이 성에 유폐가 되어서 매일 아내의 묘를 바라보며 생활했다고 알려졌다.
높은 성벽을 지닌 곡선모양의 성채는 웅장한 성문인 아마르 싱(Singh)만을 위한 것으로, 지금은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있다. 원래 웅장한 아구라성 입구는 '하티폴(Hathi Pol)'혹은 '코끼리문(Elephant Gate)'라고 부르는 내부 정문으로 이어지는 델리게이트를 통해 들어 갈 수 있었다.
아그라성에서는 멀리 타지마할이 보인다. 샤 쟈한는 만년에 자식에 의해 이 성에 유폐가 되어서 매일 아내의 묘를 바라보며 생활했다고 알려졌다.

▶ 아그라성내의 건축물
- 디완이암 (Diwan-i-Am)
1628년 샤자한이 건립한 디완이암은 강연장으로 붉은 사암으로 만들어 졌다. 3개의 열을 지어 세워진 돌기둥들은 백색 치장벽토로 기둥벽을 꾸미고, 공작의 꼬리털모양의 아치형으로 마무리되어 지붕을 지지하고 있다.
- 모티 마스지드(Moti Masjid)
샤자한이 1646년부터 1653년에 세운 대리석 사원으로 '진주 모스크'라고도 부르고 있다. 완벽한 균형비를 이루고 있는 사원은 페르시아의 명각은 완벽한 진주에 비유되고 있다. 광할한 사원 뜰 중앙에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연못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타지 마할
타지마할(Tajmahal : 세계문화유산, 1983)
1983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록된 인도의 대표적 이슬람 건축이다. 타지마할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원 중의 하나이다. 엄청난 건축비용이 들었지만, 이 하얀 대리석의 웅장한 사원은 한 여인을 향한 한 남자의 간곡한 기념비가 되었다. 1648년에 만들어져 현재는 우타르 프라데시 주(州) 아그라 교외 아그라성(城)에서 동쪽으로 약 2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타지마할(Tajmahal)이란 '마할의 왕관’이라는 뜻을 가지며, 무굴제국 황제 샤 자한(Shah Jahan)은 17년 동안 14명의 아이를 낳고 15명째 아이를 낳다가 1629년 사망한 그의 사랑하는 왕비 뭄타즈 마할(Mumtaz Mahal)을 위하여 1631년부터 짓기 시작해서 1653년에 완공을 보았다. 사원은 좌우 대칭의 총대리석으로 높이 5.5m, 종횡 94m의 기단상의 중앙에는 높이 58m의 사당, 四遇에는 높이 42m의 첨탑이 세워져있다. 1630년부터 18년 동안 국고를 탕진해 가며 완성하였고, 온갖 재보(財寶)와 미술/공예품을 한데 모아놓았다. 이 불멸의 금자탑은 이란인 우스타드 이샤에 의하여 설계된 것인데 그의 설계대로 만들기 위한 장인들은 터어키, 이탈리아, 프랑스 등지에서 차출된 장인들을 포함하여 2 만명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건축을 위한 자재로는 운반을 위해 1 천여마리의 코끼리가 동원되어야 했던 라자스탄의 마카라나에서 채취된 대리석을 비롯하여 건물 안의 세세한 장식을 위하여 러시아와 중국
등지에서 수입했어야 했던 여러가지 돌들이 사용되었는데 이처럼 엄청난 규모의 준비과정과 장인들을 동원하여 만든게 바로 타즈 마할이다. 타즈 마할의 대리석은 햇빛의 각도에 따라 다른 색감을 보여 아침과 한낮 그리고 석양 무렵의 느낌이 다르고 달빛에 따라서도 느낌이 다르다고 한다. 특히 달밝은 보름달 무렵의 타즈 마할은 그 아름다움이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