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글을 쓰는가 / 도 종 환
햇볕에 잘 마른 빨래를 개다가, 겹쳐서 잘 빠지지 않는 그릇을 떼어내려 애를 쓰다가도, 석양에 붉은 노을이 눈앞에 펼쳐지면 미지의 세계로 달려가고 싶어진 적이 있었다. 발코니에 놓아둔 야생 화초들이 어느 날 하나 둘 꽃이 피기 시작했을 때, 오랫동안 기다렸던 꽃이 처음 꽃잎을 열었을 때 알 수 없는 희열이 마음속에서 스며 나온다. 한적한 산사에 들러 풍경소리를 들었을 때, 푸른 계곡물이 시원하게 맑은 소리를 내며 힘차게 흘러내릴 때, 여행 중 기차의 차창 밖으로 지평선 가득히 온통 황금물결이 출렁거릴 때, 장마 후 큰물을 잔뜩 품었던 댐들이 방류하며 거대한 물줄기들이 일제히 아래로 쏟아져 내릴 때, 좋은 일이거나 슬픈 일이거나 일상에서 생겨나는 그런 일들에게서 나를 적당한 거리로 돌아보고 싶을 때 글을 쓰고 싶어진다.
---유병미 「가을이 오는 소리」중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왜 글을 쓰려고 하는 것일까? 이런 물음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문학이론서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한 개인으로 돌아와 내는 왜 글을 쓰려고 하는지 진솔하게 대답을 찾아보는 일은 이론서에 나오는 상식적인 결론을 읽은 일보다 훨씬 생생하다. 지금 이 글에서 인용하는 글들은 지금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왜 시를 쓰는가>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이런 과제를 내 주고 쓰게 한 글이다.
이 글의 저자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갈망이 시를 쓰게 한다고 말한다. 매일 되풀이 되는 일을 하다가 문득 눈앞에 펼쳐지는 붉은 노을을 만난다거나 발코니에 놓아둔 화초에 하나 둘 꽃이 피기 시작하는 걸 보았을 때 글을 쓰고 싶어진다고 한다. 겹쳐서 잘 빠지지 않는 그릇을 떼어내려 애를 쓰다가 붉은 노을을 만났을 때의 심정은 어땠을까. 설거지는 매일매일 되풀이 되는 일이다. 그 일을 하다가 그릇이 겹쳐서 잘 빠지지 않는 일은 사소한 일이지만 우리를 지치게 만든다. 작은 일인데도 정신적으로 힘이 들어 감당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우리를 지치게 만드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 아니다. 매일 되풀이해야 하는 사소한 일들이다. 그때 만난 노을은 ‘세상은 저렇게 아름다운데 지금 나는 무얼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저렇게 아름다운 풍경이 곧 사라질 텐데’ 하는 생각과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나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 하는 생각이 겹쳐 떠오르게 된다. 그러면 그 생각은 새로운 일, 하고 싶었던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게 된다.
발코니에 놓아 둔 야생화초들이 꽃을 피울 때, 오랫동안 기다렸던 꽃이 처음으로 꽃잎을 열었을 때 그 꽃을 바라보는 심정은 어떤 것일까. 야생화초는 산과 들에서 자라던 꽃이다. 그 꽃이 인간의 집에 옮겨져 살다가 그곳에서도 꽃을 피우는 걸 바라보며 내게도 저런 생명력이 있었는데 하는 생각을 할 것이다.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사는 동안 나는 무슨 꽃을 피웠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꽃을 보며 마음속에서 스며 나온 알 수 없는 희열의 정체는 무엇일까.
생명력. 생명력일 것이다. 그 생명력이 곧 창의력의 씨앗인 것이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푸른 계곡물, 지평선 가득히 출렁이는 황금물결, 댐에서 쏟아지는 거대한 물줄기 이런 것들은 가슴 속에 그렇게 출렁이는 것들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댐에서 쏟아지는 물줄기처럼 마음 깊은 곳에 쏟아놓고 싶던 것들이 넘실대며 고여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어느 날 문득 일상 속에 묻혀 사는 나를 다시 보게 만드는 사물, 자연현상, 일을 만나고 그것들이 그 일상과 적당한 거리를 만들게 하고, 그 거리에 서서 자신과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갖게 만드는 것 그것이 글인 것이다.
난 언제 부턴가 쓰는 것에 길들여져 있다. 말하는 것보다 쓰는 것이 더 쉽고 더 편하다. 나를 키우며 스스로 인내하던 순간들을 나는 쓴다. 쓴다는 것은 어쩌면 내 나름대로의 기록인지도 모르겠다. (.........) 그래서 나는 거창하게 문학이라는 말을 하기가 좀 부끄러운지도 모른다. (.........) 그러나 이젠 쓴다는 것에 좀 더 의미를 부여 할 필요가 있는 듯하다. 나 자신에게 좀 더 욕심을 내 보고 단순히 쓴다는 것 보다는 창작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여태 애써 들으려 하지 않았던 자작나무 숲 우듬지의 사연도 들어보고 나의 일방적인 관조의 대상이었던 저 아파트 화단의 라일락에게도 나를 보여주고 싶다. 이 가을 절름거리며 버티고 있는 내 얕은 뿌리의 흔들림이 깊숙이 땅을 비집고 내릴 수 있도록, 추운 겨울을 잘 견딜 수 있도록, 나는 양질의 보살핌으로 가슴을 따뜻이 데우고 싶다. 굳이 내가 쓰는 일이 문학을 향한 한 걸음이라면, 왜 쓰냐고 자꾸 물으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배설을 한다고.....참을 수 없는 내 안의 버거움들을 쏟아 내는 거라고.....
---조영혜 「참을 수 없는 내 존재의 버거움」중에서
조영혜씨의 말처럼 글을 쓰는 행위는 거창하게 문학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쓴다는 것 그 자체로서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배설’, “참을 수 없는 내 안의 버거움들을 쏟아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배설은 단순히 버리기 위한 행위가 아니다. 소모적인 배설이 아니라 창조적인 배설인 것이다.
나 자신을 내다버리는 일이 아니라 나를 보살피는 일이다. 그것도 “양질의 보살핌으로 가슴을 따뜻이 데우는” 일이다. 절름거리며 버티고 있는 내 얕은 생각의 뿌리가 대지 깊숙이 뿌리내리고 튼튼해지게 하려는 일이다. 그러는 동안 “자작나무 숲 우듬지의 사연도 들어보고” “아파트 화단의 라일락에게도 나를 보여주”는 일이다. 글을 쓰는 것이 자작나무 우듬지에 새순이 돋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글을 쓰는 동안 라일락에게도 나를 보여주고 라일락꽃과 마음을 서로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시는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소리를 귀담아 들었다가 그걸 베껴 적는 일이라고 말하는 시인이 있다. 자연이 주는 소리를 귀담아 듣는 일, 자연에게 나를 보여주면 자연이 알아듣는 일, 그런 자연과의 교감, 정경교융(情景交融)하는 행위가 곧 글을 쓰는 일인 것이다.
사랑과 이해의 모자람으로 항상 상처입기 십상이던 아이는 무참한 마음을 머금고 쓸쓸한 등을 보이며 오래된 티브이 다리 밑이나 뒷방 앉은뱅이책상 밑 작고 아늑하며 먼지 냄새와 상상의 공기가 있는 작은 공간에 안겨들곤 했다. 누군가의 위로가 손에 닿지 않을 때 등을 웅크린 아이가 찾아든 작고 밀폐된 안온한 공간 속에서 아이는 불가능한 꿈을 꾸고, 상처를 스스로 핥아 내리며 그에 대한 사랑을 시작했음이 분명하다. (.......) 텅 빈 시간의 길들 위에서 무너져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이 찾아들 때 그녀가 찾아간 곳은 아이가 찾아들던 뒷방처럼 그의 흔적이 있는 오래된 공간이었다. (.......) 유년의 뜰에서 걸어 나와 그녀를 내내 뒤쫓으며 위로하고 존재를 확인해주며 가버렸다 생각했지만 결코 놓아준 적 없이 곁에 있는 그를, 훗날 미련 같은 감정으로 넘겨다보지 않게 이젠 편한 마음으로 정성껏 맞고 싶은 심정, 그것이 그녀가 지금 그리고 아직도 문학을 꿈꾸는 이유다.
---김은숙 「그를 떠나보낼 수 없는 이유」중에서
나에게 시는 허기진 배를 채우는 본능이다. 내 안에는 다정하고 살가운 얘기들이 살고 있어 나누고 싶었는데 다섯 명의 남자와 두 명의 여자가 사는 우리 집은 최소한의 일상용어만 있을 뿐 대화다운 대화가 없었다. 어린 것들에게도 생각이란 게 있을 수 있다는 걸 알아차리는 어른이 내 아버지였으면 하고 얼마나 바랐던가. 당신 말씀이 곧 법이었던 아버지와 순종적인 어머니 사이에서 감수성이 예민한 조숙아는 몸으로 어머니를 도왔고 가슴으론 불합리한 생활에 대한 불만으로 말을 잃어 버렸다. 반론의 여지가 없는 암흑기를 겪기에 내 영혼은 너무도 여리고 가냘펐다. 뇌 속의 언어 세포들이 까맣게 시들어갔다. (.......) 나에게 시는 결핍된 언어에 대한 보상이다. 나에게 시는 이루지 못한 꿈이다. 꿈조차 꿀 수 없는 현실, 당장 코앞에 닥친 일들이 제 나이로 지기에는 버거워 그냥 그 날들을 살아냈을 뿐이었다. 하루살이의 삶에서 나와서 이제 나를 마주 보고 싶다. 온전히 내 바램에 올인하고 싶다. 언어가 주는 짜릿함 그 희열에 침몰하고 싶다. ---박정숙 「나에게 시는」중에서
글을 쓰려고 하는 이들 중에는 의외로 삶에서 받은 상처를 오래 간직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 이해와 사랑의 부족 그 결핍으로 인해 받았던 상처, 내면 깊숙한 곳에 남아 있는 소외의 기억, 소통의 부재 그런 것이 글을 쓰게 하는 원인인 경우가 있다. 이런 상처와 소외와 고통이 도리어 재산이 되는 분야는 많지 않다. 그러나 문학은 토양은 상처다. 상처가 스승이다. 결핍이 글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고 내면 깊숙한 아픔이 시의 밭이다. 그 아픈 기억들을 아름다운 것으로 변용시킬 수 있는 장르가 문학인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이야말로 자기의 상처를 치유하고 남의 아픔을 위로하는 의료행위인 것이다.
“오래된 티브이 다리 밑이나 뒷방 앉은뱅이책상 밑” 이런 곳을 찾아가는 아이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구석지고 밀폐된 곳을 찾아가는 심리는 어머니의 자궁으로 돌아가고 싶은 회귀의 본능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역으로 자기 존재를 확인받고 싶어 하는 심정이기도 하다. 숨어 있고 싶다는 것은 존재의 소멸을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누군가 찾아주길 바라는 마음인 것이다. 글을 쓰는 이들 중에는 개인적인 시간, 개인적인 공간 속에 오래 갇혀 지내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그 곳에서 무언가를 쓰고 또 쓰는 행위는 다른 사람들에게 끝없이 자기를 알리고 싶어 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자기표현이야말로 자기 존재의 확인인 것이다. 부재의 시간 속에서 소통을 향한 신호를 끝없이 날리는 일이다. 시는 정신적 허기를 채우기 위한 행위이며 ‘결핍된 언어에 대한 보상’이다. 대화다운 대화에 대한 욕구, 억압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욕망이다.
글이라는 것은 참 좋다. 슬프고 화나는 것을 글로 방출하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안정되곤 한다. 글을 통해 일종의 카타르시스가 가능한 셈이다. 속상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적어놓다 보면 어느새 내 감정을 지면에 옮겨놓은 양 속이 후련해지고, 나중에 적은 글을 지우거나 쪽지를 불에 태우기라도 하면 마치 내 감정을 직접 없애버리는 것처럼 아무 뒤끝 없이 회복되기도 한다. 또한 뭔가 답답한 일이 있어도 글로 적어 본다. 그렇게 하면 적는 과정에서 일이 정리되면서 의외로 손쉽게 해결될 때도 있고, 굳이 그 일이 풀리지 않는다 해도 우선 마음이 차분해져 다른 대안을 찾는 융통성을 얻을 수 있다. (.......) 격렬해도 좋고 잔잔해도 좋다. 다만 중요한 것은 '울림'. 나 혼자 쿵쿵 울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읽는 이로 하여금 공명하도록 만드는 것이 내가 하고 싶은 문학이다.
---반윤정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중에서
나이는 들었어도 가슴 한편에 자리한 소곤거리는 꽃봉오리 같은 마음, 그것이 문제이다. (........) 나만의 정신세계를 어느 때 부터인가 그려내고 싶어졌다. 미풍에 흔들리는 나뭇잎만 봐도 눈물이 핑 도는 벅찬 감정들을. 문학을 하면서 좋은 점은 나의 내면의 세계를 글로 풀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비록 신변잡기에 불과할 지라도 그것들을 다듬는 작업이 나에게는 필요하다. 내가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는 작업이 지금의 과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요즘은 그냥 지나쳐 버렸던 일들도 한 번쯤 여과시켜 되새김질 해 보는 것에 쏠쏠한 재미를 느낀다. 잠재된 나의 세계가 어디까지 펼쳐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혼자서 끙끙 앓았던 내면의 세계를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맑은 영혼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
---전영순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중에서
글이란 무엇인가를 반윤정의 글은 잘 보여주고 있다. 글은 카타르시스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슬픔이든 분노이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적어가는 과정은 감정을 객관화하는 과정이다. 자기 감정이지만 글로 옮겨가는 과정을 거치면서 감정은 여과되고 해소되며 창조적으로 승화한다. 감정의 덩어리 자체는 아직 글이 아니다. 그러나 감정이 여과과정을 거치면서 문학적 정서로 변화하고 포에지는 포엠으로 변한다. 격렬하거나 뜨겁거나 휘몰아치던 감정이 차분해지고 그 감정의 덩어리들을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게 된다. 그리고 생각한 뒤에 행동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간다. 깊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런 훈련을 통해 ‘감정에 이끌려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되면 나를 울게 하던 감정이 다른 사람을 울리는 힘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울림’인 것이다.
이른바 남을 울리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 감동을 줄 수 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글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힘은 남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다. 우리가 글 쓰는 사람을 존중하는 이유도 그들이 남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가슴 한편에 자리한 소곤거리는 꽃봉오리 같은 마음”, “미풍에 흔들리는 나뭇잎만 봐도 눈물이 핑 도는 벅찬 감정들” 이런 감정은 참 소중한 것이다. 이런 정서가 없이는 글을 쓸 수 없다. 시인들 중에도 이런 소곤거림과 울림이 사라져 버려 메마르고 건조한 글만 생산해내고 있는 이들이 있다. 감정의 파동이 없으면 이미 가슴 속의 시인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만 이 소중한 감정이 센티멘털의 차원으로 떨어지지 않고 정서다운 정서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가꾸고 다스리는 일이 중요하다. 그러는 사이에 ‘혼자서 끙끙 앓았던 내면의 세계“가 하나씩 ’맑은 영혼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어느 때 부터인가 시는 만나고 헤어지는 아픔과 삶의 고통 속에서 늘 곁에서 애인이 되어 주었다. 삶이 절망이여도 쓸쓸하여도 나의 토해냄을 받아주는 나의 시는 내가 심고 가꾸고 보살펴야 할 밭이었고 다시 내게 돌려주는 향기이고 꽃이었다.
---김용미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중에서
산을 만나고 아파트 정원수 위로 날아다니는 직박구리를 만나고, 각자 개성을 가지고 서 있는 나무들의 숨결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내가 문학을 만나면서부터이다. 물론 전에도 나무를 보고 새도 보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본 것이지 하나하나 개체로서의 긴밀한 만남은 아니었다. (.......) 문학과의 만남은 내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사물, 그리고 살아있는 생물들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문학 안에서 세상 모든 사물은 생명 없는 것이 없다. 눈, 코, 귀, 입을 가지고 각각 묘한 매력을 풍기며 나를 바라본다. 호소한다. 미소 짓는다. 그들을 가슴으로 가져와 다듬고 입히고, 부풀리고 깎아내며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 했을 때는 세상 무엇도 부럽지 않을 뿌듯함과 함께 그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윤선희 「내가 문학을 하는 이유」중에서
글은 “삶의 고통 속에서 늘 곁에서 애인이 되어” 주는 존재이다. 내 속에 들어 있는 가장 내밀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가까운 친구이다. 내 하소연을 들어주고 내 투정과 불만을 받아주며 나를 위로해주는 애인인 것이다.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시를 쓰게 되면 시는 “내가 심고 가꾸고 보살펴야 할 밭”이고 “다시 내게 돌려주는 향기이고 꽃”’이 되어 줄 것이다. 그래서 글을 쓰고 시를 짓고 문학을 하는 것이다.
윤선희씨 말대로 글을 쓰게 되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사물, 그리고 살아있는 생물들을 보는 눈이 달라”지게 된다. 세상의 크고 작은 일들을 관심 있게 바라보게 되고, 그것들 속에 들어 있는 새로운 생명을 발견하게 된다. 보이는 것을 그냥 보는 게 아니라 보이는 것 이상을 보는 눈을 갖게 된다. 잘 보지 않던 나무를 유심히 보게 되고 “나무의 숨결을 느끼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내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아 왔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을 기억해 왔다. 눈으로 대상을 바라보지만 관찰의 수준으로 대상을 바라본다. “물론 전에도 나무를 보고 새도 보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본 것이지 하나하나 개체로서의 긴밀한 만남은 아니었” 던 것이다.
그러나 글을 쓰게 되면 우리의 눈은 대상 속에 들어 있는 의미를 간파해 내는 눈을 갖게 된다. 내가 관심을 갖게 되는 대상 하나하나와 긴밀한 만남을 가지기 시작한다. 대상과 나와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내 앞에 있는 장미꽃이 나와 새로운 관계를 갖기 시작하는 장미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도 그런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나 자신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내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고 새로운 인생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글을 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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