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미와 인간미 물씬한 지리산 도보길
2011년 지리산 도보길이 목걸이처럼 이어지면 길은 전남·전북·경남을 지나고, 구례·남원·하동·산청·함양 군과 80여 마을을 지난다. 장장 300여km에 달하는 장거리 도보길이다. 길이 열린 것은 지난 4월 말. 옛길·고갯길·숲길·강변길·논둑길·농로길·마을길 등이 뒤섞인 길은 매동마을에서 금계마을까지 이어진다. 2구간은 의중마을에서 세동마을까지.
제1 구간은 매동마을 초입에서 시작된다. 안내자로 나선 지리산생명연대 장승준 팀장은 “천천히 갈수록 숲이 더 잘 보인다. 시간당 2~2.5 km로 걷겠다”라고 선언했다. 성질 급한 사람에게는 한심할 정도로 느린 속도였지만, 그의 결정은 옳았다.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걸으니 지극히 여유롭고, 덕분에 바람개비 모양의 자그마한 탱자나무 꽃과 분홍 싸리나무 꽃을 접안렌즈처럼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들여다본 호두나무와 감나무의 어린잎은 만지면 병들 것처럼 여리디 여렸다.
![]() |
||
ⓒ시사IN 백승기 사단법인 ‘숲길’에서는 매주 수요일·토요일 ‘길동무 프로그램’을 운영한다(위). 매회 선착순 20명. |
지리산 길은 마을을 끼고 돌아서인지 고추밭, 고사리밭, 감자밭, 옥수수밭이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호박벌 한 마리가 잉잉거려서 바라보니 바로 앞에 오디를 주렁주렁 매단 뽕나무다! 문득 잊었던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올랐다. 혓바닥과 옷자락이 까매지도록 오디를 따먹던 그 시절. 걷는다는 것이 추억하고, 바라보고, 명상하고, 발견하고, 성숙하는 것이라 하더니 맞는 말이다.
천왕봉을 보며 초록 물이 들다
한참을 무리 틈에 끼어 걷다가 슬며시 뒤로 처졌다. 그제야 사라졌던 바람소리와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쏴아아, 툭툭” 하고 들려왔다. 떡갈나무 밑 길은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길을 잃을 것처럼 은밀했다. 갈림길에 서서 조용히 눈을 감아본다. 어디선가 샘물 흐르는 소리가 “잘잘잘” 들려온다. 이파리들은 저희끼리 떠드는지 연방 바스락거렸다. 온몸에 초록물이 드는 듯하더니, 이내 행복감이 밀려왔다. 도시에서 홀로 있다는 것은 외로움이지만, 산속에서는 자유롭고 홀가분하고 당당하다는 뜻이다.
![]() |
||
ⓒ시사IN 백승기 지리산 도보길에는 논둑길(위), 옛길, 숲길, 고갯길, 마을길 등 다양한 길을 지난다. 멀리 지리산 능선이 보인다. |
드디어 전라도와 경상도 경계인 등구재. 제법 가파른 언덕에 오르자 뒤따라온 바람도 고개를 넘는지 풀들이 일제히 눕는다. 나무가 휘청거릴 만큼 대차게 부는 바람. 꼿꼿한 나무 아래에 별 같은 양지꽃 무리가 한 우주를 이루었다. 장을 보러, 약을 사러 이 고개를 넘었던 옛 사람들도 이곳에서 땀을 식히며 양지꽃에 반했으리라.
![]() |
||
어디선가 “꿔어어잉” 하는 꿩소리가 들려온다. 세동마을 못 미쳐 창원마을 가까이 내려오자 옻나무 밭이 펼쳐져 있다. 나무들은 옻을 충전하는지 불그죽죽했다. 그곳에서 오른쪽 멀리 지리산 최고봉 천왕봉(1915m)이 건너다보였다. 밭둑에 홀로 앉아 천왕봉을 보며 새소리·개구리 소리·벌 소리·물소리를 듣는다. 물소리·새소리를 베고 잠들면 회색빛 의식이 초록으로 물들지 않을까 하고,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창원마을로 내려오는 동안에 계속 천왕봉과 지리산 능선이 넘실거린다. “감이 익는 가을에 보면 더 장관이다”라고 장승준 팀장은 말했다. 자세히 보니 아침 산하고 오후의 산은 표정이 판이했다. 아침 산은 막 세수를 하고 난 듯 신선했는데, 오후의 산은 나른하니 잠에 빠져 있는 듯했다. 석양이 내리쪼이면 산은 또 어떤 모습일까. 보면 볼수록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연둣빛 감나무와 호두나무가 싱그러운 창원마을도 아름다웠다. 처음 열린 지리산 도보길 끝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딸을 데리고 온 고영규씨(부산)는 “큰 기대 안 하고 왔는데, 생각보다 볼거리가 많아 내내 즐거웠다”라고 말했다. 백해룡씨(대구)는 “컴퓨터와 공부에 시달리는 청소년들의 수학여행 코스를 삼으면 딱 좋겠다”라고 말했다.
다섯 시간 남짓 걸었는데도 무언가 허전한 느낌. 짧은 거리 때문일까, 아니면 외로움이 지나쳤던 걸까. 여러 사람과 걸어서 나만의 감동과 리듬을 찾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다음에 오면 길도, 지리산도, 여행자도 다른 모습이겠지? ( ‘숲길’:www.trail.or.kr)
출처 : 여행, 바람처럼 흐르다
글쓴이 : 무심재 원글보기
메모 :
'낯선골목길을걷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지리산 길 (0) | 2009.01.03 |
---|---|
[스크랩] 지리산 옛길 트레킹 (0) | 2009.01.03 |
[스크랩] 지중해, 내 푸른 로망 (0) | 2008.10.25 |
느릿느릿 걷는 길 지리산 (0) | 2008.08.08 |
지리산 800리 도보길 (0) | 2008.06.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