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La Leçon de piano, The Piano (1993)
감독 : 제인 캠피온
출연 : 홀리 헌터(아다)
하비 키이텔(베인즈)
- The Piano (1993)
1.To The Edge Of The Earth
2.Big My Secret
3.Wild And Distant Shore
4.Heart Asks Pleasure First
5.Here To There
6.Promise
7.Bed Of Ferns
8.Fling
9.Scent Of Love
10.Deep Into The Forest
11.Mood That Passes Through You
12.Lost And Found
13.Embrace
14.Little Impulse
15.Sacrifice
16.I Clipped Your Wing
17.Wounded
18.All Imperfect Things
19.Dreams Of A Journey
오늘 당신은 누구의 육체를 연주하고 있습니까--피아노
1. 이 영화를 난해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영화는 난해한 영화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영화를 시작하는 방식 그리고 끝내는 방식은 난해합니다. 이 영화는 다음과 같은 에이다(홀리 헌터)의 화면 밖의 목소리로 시작합니다.
에이다 : 당신이 듣는 이 소리는 내 말소리가 아니다. 내 마음의 소리다. 나는 여섯 살 이후로 말해본 일이 없다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나도 모른다. 아버지는 그것이 나의 불길한 재능 때문이라고 하셨다. (--) 오늘 아버지는 나를 본 적도 없는 남자에게 나를 시집보냈다. 내 딸과 나는 곧 그 남자의 집으로 가게 된다. 남편은 내가 말 못하는 건 상관없다 고 말했다.
보이스 오버로 되어 있는 위의 모든 정보가 난해합니다. 에이다는 왜 벙어리일까? 에이다의 아버지는 왜 '본 적도 없는 남자'에게 딸을 시집 보낼까? 에이다의 미래의 남편은 왜 아내가 말을 못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을까? 베인즈와 결혼해서 살 때 에이다의 딸은 왜 부재할까? 이 질문들을 해명하는 것이 이 글의 목표는 아니지만, 이 질문은 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므로 간단히라도 밝혀 보겠습니다. 위의 보이스 오버에서 먼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에이다의 아버지와 에이다의 미래 남편에게는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에이다가 말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해 두 인물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결국엔 크게 개의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이 정보는 거꾸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에이다의 아버지와 에이다의 남편은 에이다가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딸 혹은 아내가 자기 목소리를 내는 순간 이 두 가부장은 응징을 통해 '거세'해 버린다고 말입니다. 아버지 앞에서 말 못하는 것, 남편에 의해 손가락이 잘리는 것, 이 모두가 거세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에이다에게 손가락은 목소리이니 더욱 그러합니다. 따라서 에이다는 말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기를 포기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베인즈는 나에게 인조 손가락을 만들어 주었다'는 이 영화 종결부의 보이스 오버가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베인즈(하비 키이텔) 앞에서 에이다는 비로소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에이다는 비범한 재능이 있는 여자입니다. 그리고 자기 주장이 강한 여자입니다. 수화할 때의 에이다의 표정과 몸짓을 보십시오. 칼날처럼 섬뜩합니다. 그러나 그 재능을 아버지는 불길한 것으로 여기고, 그 강함을 남편은 우려합니다. 남성 우월주의로 말한다면 남편은 아버지보다 더 합니다. 남편은 그 강함에 대해 거리를 두고 보는 것으로, 그 재능에 대해서는 그것을 펼 수 있는 기회 자체를 봉쇄하는 것으로 대처합니다. 혼수로 가져 온 에이다의 피아노를 바닷가에 버려 두는 행위, 에이다의 손가락을 도끼로 자르는 행위 말입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의문 중의 하나는 여기서 제기됩니다. 에이다와 남편 사이에 정상적인 부부 행위가 있긴 있었는가? 이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이 의문은 이 영화 내에서 풀 수 없는 것이 됩니다.
이제 에이다의 딸 6세가 이 영화에서 갖는 의미는 자명해졌습니다. 에이다의 딸은 에이다가 목소리를 내는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에이다의 자기 주장은 딸의 입을 거치는 순간 한번 걸러져서 6세의 목소리만큼이나 약화됩니다. 에이다의 딸은, 아버지와 남편에게 에이다의 주장이 허용되는 정도를 뜻하기 위해 사용된 것입니다. 에이다와 베인즈 씬에서 에이다의 딸이 늘 부재한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2. 숨통 트이는 곳에서 여자는 자신의 매력을 노출시킵니다
'피아노'는 단지 혼수품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피아노는 에이다의 언어이자 정신이자 육체였습니다. 원주민 인부를 시켜 혼수품을 나르면서 남편은 피아노를 바닷가에 놔 둡니다. 피아노는 너무 무거워서 운송비가 많이 든다는 것을 노랭이인 남편은 약싹빠르게 계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 에이다의 남편 스튜어트(샘 닐)는 아내로부터 아무런 만족도 얻지 못합니다. 남편은 에이다를 보면서 늘 그녀의 결함만을 봅니다. 그에게 에이다란 언어 장애아이자 발육 부진아일 뿐입니다. 그들은 한집에 살지만 부부라기보다는 동거인에 가깝습니다.
에이다의 매력을 발견하는 남자는 베인즈입니다. 남편이 출장간 뒤, 남편의 친구인 베인즈에게 에이다는 피아노가 있는 해변가로 자기를 데려다 주기를 희망합니다. 그 간절함을 거절하지 못한 베인즈는, 피아노 앞에 앉는 순간 에이다가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자태를 뿜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에이다의 비밀을 베인즈가 알아보는 장면이라 하겠습니다. 에이다의 매력을 유독 베인즈만이 알아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베인즈는 권위주의자도 남성 우월주의자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자가 경계심을 풀고 자신을 드러내기까지를 인내심을 갖고 기다릴 줄 아는, 그러니까, 드문 종류의 남자였던 것입니다.
피아노가 에이다의 매력이자 그녀 자체임을 알게 된 베인즈는 원주민의 땅을 야금야금 얻어내는 일에 거의 정신이 나가 있는 에이다의 남편에게 거부할 수 없는 거래를 제안합니다. 스튜어트가 탐낼 만한 땅을 주고 피아노를 사는 일 말입니다. 스튜어트는 횡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생색내기 위해 아내로 하여금 개인 교습을 시켜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에이다가 베인즈의 집을 찾는 일은, 아내를 결코 소중한 존재로 생각한 일 없는 이 남편이 강제를 하는 통에 일어난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에이다의 정신은 베인즈 집에 저당 잡힙니다. 에이다가 베인즈의 집을 찾아가는 일을 가리켜 피아노 개인 교수쯤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녀에게 피아노가 갖는 의미를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베인즈의 집을 찾아가는 행위는, 에이다가 자신의 영혼을 되찾으러 가는 절박한 행위입니다. 절박한 사람은 또 있습니다. 피아노를 산 베인즈 말입니다. 그가 비싼 값을 치르고 피아노를 샀다는 것은 곧 에이다를 향한 사랑의 강도를 뜻합니다. 그는 마을 모두에게 웃음 거리가 되기를 택할 만큼, 자신 소유의 가장 귀한 것을 지불할 만큼, 그녀 때문에 아무 것도 못 먹고 못 잘 만큼, 그녀의 매력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한 여자의 절박함은 한 남자의 절박함과 만납니다. 처음에 그들의 절박함은 게임이라는 좀더 편안한 형식을 취합니다. 피아노의 가치를 건반수만큼으로 계산하고, 건반 하나 혹은 여러 개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남자의 시선 혹은 손길을 여자가 허락하는 거래 말입니다. 남자가 제안한 하얀 건반수만큼이 여자에 의해 검은 건반수만큼으로 수정되지만, 거래는 이루어지고 게임은 시작됩니다. 베인즈는 이제 피아노를 치는 에이다의 치마속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피아노를 치는 그녀를 만질 수도 있습니다. 건반 다섯 개를 한꺼번에 지불하면 그녀의 옷을 모두 벗겨 침대에 눕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게임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게임은, 에이다에 대한 욕망 달성을 가능케 해 주었지만, 사랑이 욕정으로 변질되어 떠오르는 치욕까지를 감춰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베인즈는, 피아노를 그녀에게 조건 없이 넘겨주는 것으로 상처뿐인 이 게임을 종료시킵니다.
뒤늦게 자기 마음 속에 움튼 사랑을 발견하는 것은 에이다입니다. 그토록 갈망하던 피아노를 되찾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그것을 연주하고 싶어하지 않음과 만납니다. 그녀는 베인즈의 집에서 피아노를 연주할 땐 정작 느끼지 못했던 자신에게 향해진 시선과 손길을 떠올립니다. 되찾은 피아노 앞에서 그녀가 오히려 더 애타게 찾고 있는 것은 베인즈의 시선과 손길입니다. 결핍이야말로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가 를 알게 만듭니다. 부재가 감지되는 순간, 그 부재를 지우고 원래 상태를 되찾고 싶은 욕망이 익숙한 욕망인 피아노 연주 욕망을 능가해 버립니다. 이제 그녀는 피아노를 행위가 실은 고독한 자기 연주 --자위 행위였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그녀 또한 깨달치는 것만으로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이러한 그녀를 통해 알게 되는 것은 눈 감고 피아노 치는 에이다의 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독한 자위 행위보다 뚜엣의 하모니가 훨씬 낫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뜨거워진 그녀는 달려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베인즈에게로 말입니다. 혼외 정사를 향해서 말입니다.
3. 사랑 받지 못하는 남자는 자신의 잔인함을 이기지 못합니다
처음에 스튜어트는 인자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교양 있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잔인해 보인 것은 베인즈였고, 문맹이었던 사람 또한 베인즈였습니다. 그러나 그 두 사람 사이에 에이다가 개입되는 순간 두 사람은 달리 보입니다. 스튜어트는 탐욕 때문에 사랑의 기쁨을 모르는 인간이었음이 드러납니다. 교양과 지식은 있지만, 그것을 동원해 원주민으로부터 땅을 빼앗는 데에 골몰해 있는 노랭이에 불과한 인간일 뿐입니다. 자기 아내의 매력조차 다른 남자를 통해서야 비로소 발견할 만큼 어리석은 인간일 뿐입니다.
베인즈와 에이다가 함께 벌이는 육체의 연주(이 영화에서 이들이 벌이는 것을 이 표현 외에 달리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를 스튜어트가 목격하게 된 것은 우연입니다. 스튜어트는 아내의 바보 짓 때문에 베인즈와의 거래가 깨질까봐 그것을 막기 위해 베인즈의 집에 갔고, 집 밖으로 흘러나오는 신음 소리 때문에 틈새 많은 베인즈의 목조 주택을 엿보게 되었고, 그리하여 베인즈의 벗은 몸 옆에 낮은 자세로 엎드려 있는 아내의 알몸을 직시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때 이 영화에서 가장 난해하다고 해야 할 기이한 장면이 나타납니다. 아내의 부정을 목격하는 그 최초의 장면에서 취한 스튜어트의 태도 말입니다. 그 순간 그는 어떠한 분노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 순간 그는 부정의 현장에 뛰어들지 않습니다. 결정적인 그 순간에 그가 노출시키고 있는 것은 남편의 시선이 아니라 외갓 남자의 시선입니다. 아내의 부정 앞에서 외갓 남자의 시선을 취할 수 있는 남편의 심리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 장면은, 남편 스튜어트가 아내 에이다를 그 동안 어떻게 대접했는가를 단숨에 요약합니다. 단 한 번도 아내로부터 성적 매력을 느낀 적이 없기에 베인즈만한 남자가 그녀와 성행위를 벌일 욕망을 가졌다는 그 사실 자체를 이 남편은 경이로움을 갖고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 엿보기로 인해 스튜어트는 에이다에 대한 성욕을 비로소 갖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또한 분명한 것은 아내의 매력이 손가락에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는 점입니다. 손가락이 육체에 얼마나 관능적일 수 있는지를 그는 목격한 것입니다. 그는 베인즈와 관계를 추궁하는 대신 그녀를 방에 감금하고 자신의 육체를 그녀가 그렇게 연주해 주기를 희망합니다. 그녀의 연주를 모두 다 참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거기서 그는 쾌락을 얻기는 합니다.
그러나 스튜어트가 그 순간 보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아니, 또 다시 그 장면이 주어진다 해도 그는 결코 보지 못할 것이 있습니다. 그는 그저 손가락의 정교한 움직임이 주는 관능만을 보았을 뿐입니다. 그 움직임이 오직 사랑에 의해서만, 그러니까 사랑하고 사랑 받는 자들이 행하는 교감에 의해서만 가능한 행위임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감금 상태에서 놓여나자마자 에이다는 베인즈에게 사랑을 전합니다. 건반 하나에다 "내 마음을 당신께 바쳐요!"를 새겨서 말입니다. 그러나 이 사랑의 정표는 베인즈에게 전달되지 못합니다. 에이다의 딸은 제대로 심부름하지 않고 그것을 스튜어트에게 갖다 주기 때문입니다. 주인을 잘못 찾아간 사랑의 정표는 질투의 도구가 됩니다. 아내의 부정 앞에서 스튜어트는 예전처럼 외갓 남자의 시선이나 심리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 또한 에이다에게서, 베인즈에 비한다면 사소한 크기지만, 쾌락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모조리 바쳐야 할 사랑을 다른 남자에게 바치고 있는 에이다를 스튜어트는 이제 용서할 수 없습니다. 에이다의 사랑이 베인즈에게 가고 있는 것을 목격하는 순간 자신이 사랑 받지 못하고 있음을 뼈저리게 상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사랑 받지 못한다고 되뇌이고 싶어하는 남자의 질투는 쉽게 잔인해집니다. 아내의 분신인 피아노를 도끼로 내려 찍고, 그래도 분이 안 풀려 아내의 손가락을 도끼로 잘라냅니다. 사랑을 잘라내는 방식으로 밖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진저리치게 하는 방식으로 밖에는 달리 사랑할 줄 모르는 자들이 흔히 벌이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잔인함을 스튜어트는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4. 간절한 사랑은 여자를 순결하게 합니다
이 영화의 난해함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베인즈와 살기 위해 뉴질랜드를 떠나 영국으로 가는 뱃길에서 에이다가 피아노를 바다에 빠뜨리기를 희망하는 행위 말입니다. 피아노가 바다에 빠뜨려지는 순간 사고를 위장해서 자신 또한 바다 속으로 빠지는 행위 말입니다. 피아노와 함께 끝장나기를 희망하여 바다에 빨려들어가기를 택한 에이다는 다음 순간 살고자 하는 의욕으로 수면 위로 치솟아 오릅니다. '자살 욕망' 은 순간적으로 일어나고 '생존 욕망' 또한 순간적으로 일어납니다. 너무도 순간적으로 일어나서 이 두 행위에서 무엇을 읽어야 하는 것인가 또한 아득합니다.
생각의 방향을 바꿔 보겠습니다. 너무도 빨리 일어난 이 사건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빨리 일어났다는 그 사실 자체가 아닐까요? 더럽혀졌다고 혹은 상처 입었다고 생각하기 쉬운 여자의 마음이 한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순간 그것이 얼마나 빨리 치유되는가를 보여주는 사건이 아니겠습니까? 진실한 사랑이 얼마나 빨리 시체처럼 살아온 인생을 생동감 있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가에 대한 비유가 아니겠습니까?
이렇게도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소한 것이지만, 에이다의 피아노에 'NEW ZILAND'라는 각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니까? 이 사실을 고려하는 순간 에이다의 피아노는 버려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이 각인은, 뉴질랜드가 영국의 식민지이듯이, 에이다가 '아버지'와 '남편'이라는 제국주의의 식민지였음을 드러내기에 그러합니다. 에이다가 목소리를 찾았다는 것은, 여성을 식민지처럼 경영하지 않는 남자를 비로소 찾았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바다 속에 풍선처럼 떠 있는 *의상을 과거의 그녀로 읽어야 합니다. 그 '의상'이 여성의 몸을 감금하는 구조로 되어 있는 사실은 너무도 잘 기억하시겠죠?
(채명식/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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