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뉴 카슬에서 열린 타이탁닉 전시회 입구에 진열된 타이타닉 남 여 주연 잭과 로즈의 의상 2. 시드니 무어 파크에 오픈한 폭스 스튜디오 안에 타이타닉 체험관이 있다 3. 브로컨 힐 스타트공원에 세워진 타이타닉 기념탑에 찬송가 가사와 악부가 새겨있다
호주 내륙에 세워진 타이타닉 기념탑
브로컨 힐(Broken Hill)
인디언 퍼시픽(Indian-Pacific)으로 명명(命名)된 대륙 횡단 열차를 타고 시드니를 전날 오후3시에 떠나 내륙으로 18시간을 달렸다. 다음날인 1998년 10월 16일 아침 9시에 브로컨 힐(Broken Hill)에 도착했다. 호주대륙내부에서 가장 큰 도시가 바로 브로컨 힐, 관광안내서에는 도시 인구를 2만 3천명으로 표시했다. 경기도 가평군은 호주인들이 지금도 기억한다. 호주군의 한국참전기념비가 가평군 북면에 있기때문이다. 가평읍과 북면(北面)의 인구가 브로컨 힐의 인구와 같다.
약 5년반 전인 98년 2월 타이타닉(Titanic)이 최고의 인기 속에 지구촌의 모든 영화관을 독점 할 때 시드니 도심에 있는 빅토리아 빌딩 백화점 3층에서 타이타닉 도서전시전이 개최되었다. 이때 우연히 타자지 크기의 타이타닉 악대 추모 기념탑 사진 한 장을 보게 되었다. 1913년, 85년 전에 촬영된 흑백사진이다.
타이타닉 밴드맨들의 고향인 영국의 어느 시골 마을에 있는 추모탑일 것이라고 생각을 하며 설명문을 읽어가니 장소가 호주 내륙의 브로컨 힐이다. 우체국에 비치된 시외전화 번호부에서 브로컨 힐 여행자 정보 센터를 찾아내 조회하니 스타트(Sturt)공원에 추모탑이 있음을 알려준다. 내륙 오지(奧地)라 건강을 생각하여 반년을 기다려 3박 4일의 취재 여행이 시작 되였다.
내 주를 가까이
"여객선 타이타닉에서 마지막까지 연주를 계속한 악사들을 추모하여 브로컨 힐 시민들이 뜻을 모아 이 추모기념탑을 세웠다" 이어서 오선지(五線紙)에 8분의 6박자 4소절의 악보와 "Nearer, My God, to Thee"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의 찬송가 가사가 함께 새겨져 있다. 인화지 사진으로는 뚜렷하게 보이지만 신문 인쇄 사진에는 문자구별이 잘 되지 않는 것이 유감이다. 마침 지나가는 현지 학교 10학년 학생들을 불러 추모탑 앞에 세워 놓고 사진을 촬영했다.
어떤 이유로 이 기념탑이 이곳에 세워 졌을까. 관광 안내 센터의 청년 직원은 질문 내용을 설명하기에 앞서 이런 말을 했다. "영화 타이타닉의 상영으로 지구촌이 떠들썩하지만 기념탑에 대해 문의하고 직접 브로컨 힐을 찾은 사람은 당신이 처음 입니다." 브로컨 힐 안내 책자에도 소개 안 된 기념탑을 알 방법이 없는 탓이다.
친절한 청년의 설명내용의 요약이다 - 1900년 초에는 은(銀),석(錫),아연 등의 성수기로 브로컨 힐 광산들이 번창 할 때라 경기가 좋았다. 신흥 광산도시로써 스포츠 말고는 오락이 없고 구세군, 시티, 광산 등 당시 4개의 밴드가 크게 활동을 했다. 타이타닉 악사들의 미담을 듣고 감동한 밴드맨들이 건립기금 모금운동을 펴 타이타닉 침몰 1년 반이 지난 1913년 12월21일 추모탑의 제막식이 거행됐다. 식순에 따라 브로컨 힐 4개 밴드가 합동 연주한 곡명이 바로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의 찬송가이다.
영화 타이타닉
국제 해상 조난 신호 SOS의 모르스 부호(... - - - ...)을 타이타닉 수석 통신사 필립은 3회 연속 통신 발사했다. 긴박한 상황 속에 승객들은 구명정으로 배를 떠나기 시작했고 미처 따나지 못한 승객들은 마지막으로 남은 조립식 긴급 구명정으로 몰렸다. 선장을 상징하는 4개의 소매 금줄이 돋보이는 정장차림의 스미스(Smith)선장이 선교 조타실(操舵室)로 들어선다. 이 때 보트 갑판 상에서 밴드맨들은 '내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찬송가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부인 혼자는 구명정 타기를 거부하고 부군을 따른 1등 선객 노부부는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누워 최후를 기다린다. 다시 악사들의 찬송가 연주광경이 잠시 보이고 화면은 3등 선실로 옮겨진다. 허름한 옷차림의 어머니가 나이 어린 남매를 토닥거리는 장면이다. 이어서 화면은 선교로 옴겨져 조타실 앞 유리들을 깨고 폭포수모양 해수가 밀려들어와 선장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악대의 연주는 "... 숨질 때 되도록 늘 찬송하면서..." 찬송가의 연주는 끝난다.
영화는 잭으로 분한 디카프리오와 로즈로 분한 윈슬렛의 사랑이야기로 대 히트를 했지만 카메론 감독의 속 깊은 또 하나의 의도가 담긴 화면은 3등 선실에 있다고 본다. 어린이와 부녀자 구조 우선의 선장명령에도 불구하고 왜 두 어린 남매는 버려 졌는가? 1등,2등실 어린이 30명은 전원 구조된 반면 3등실 어린이는 57명만 구조되고 52명은 타이타닉과 운명을 같이 했다. 1등실 승객 $3,100, 3등실은 $38의 운임 차이 탓일까. 당시 $38의 현 화폐가치는 호주$1,300 이다. 이상은 카메론의 타이타닉 영화 이야기이다.
필자가 살고 있는 호주 시드니 교민촌 캠시를 중심으로 주위 4개 도시 비디오 숍 CIVIC을 두루 살펴 1953년작 흑백영화 타이타닉을 빌려 왔다. 이 영화에서는 배에 남은 승객과 선원들이 밴드 연주에 맞춰 찬송가 "내 주를 가까이"을 합창하는 장면으로 'END' 사인이 뜬다. 1998년 1월2일 밤9시 민영 TV CH-9 에서는 "SOS 타이타닉" 영화가 방영되었다. 1979년 작품으로 천연색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는 밴드가 찬송가 "내주를 가까이-- "대신 "4계절의 가을"과 경음악을 연주하는 것으로 묘사 되였다.
찬송가와 경음악
밴드 악사들이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켜 연주 한 것은 분명한데 "내주를 가까이"를 연주했다. 아니다 "가을과 경음악"을 연주했다고 두 가지 주장이 서로 엇갈린다. 타이타닉 밴드맨 8명 전원이 사망했기 때문에 어느 쪽이 진실인지 영원한 숙제로 남아 있다. 집에 있는'해설 찬송가 364장 "내 주를 가까이--" 하단에 인쇄된 해설은 1635명의 승객들이 죽어 가면서 이 찬송가를 불렀고, 악단도 이 찬송가를 연주했다고 기록했는데 호칭과 수치가 다르지만 참고로 원문 그대로 옴겼다.
울란라(Woollanra)도서관에서 우송해준 "실화 타이타닉 (The Story of THE TATANIC)"은 가장 신빙성 있는 책이다. 이 책에서 밴드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보았다. 악대가 연주한 보트 갑판 근거리에 있는 통신실에서 일한 차석 통신사 브라이든은 구조된 뒤 악단의 연주곡은 가을이라 했다. 구명정 하강을 직접 지휘하다 살아난 라이드 항해사는 경음악이라 증언했다.
"신문에 보도된 것처럼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을 밴드가 연주했다면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게 되어 승객들이 공황상태로 유도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레이시(Gracie) 미 육군 예비역 대령의 회고담이다. 찬송가를 악대가 연주하는 것을 보았다는 알버트 부인은 "내 주를 가까이"를 연주한 시간대에 그녀가 승선한 No3구명정은 본선으로부터 1/4 마일(약 460 미터) 떨어져 있었다. 해상에 떠있는 그녀가 탄 구명정에서는 절대로 듣지 못할 거리다.
91년 전의 미국 신문들도 타이타닉 영웅들을 만드는데 일조를 한 셈이다. 영화는 흥행위주로 하기 때문에 픽션으로 꾸며져 "내주를 가까이"가 연주된 것으로 관객을 끄러드렸다. "내 주를 가까이" 찬송가는 실제로는 연주 안 했다는 쪽에 무게가 놓인다.
3인의 선장
1999년 4월 12일 아침 일곱시 뉴 카슬(New Castle)에서 개최 중인 세게 일주 화이트라인(WHITE LINE) 기선 소속 타이타닉 전시전을 참관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뉴 카슬은 호주에서 6대도시의 하나로 시드니에서 북쪽으로 170킬로 떨어져 있다. 서울-청주간 거리이다. 안내서의 설명에는 400만 달러 상당의 전시물이 있어 세계적으로 평가를 받는다고 했다. 입장료가 $15인데도 구경꾼이 많았다.
흥미를 준 것은 1986년 해저 탐사 잠수정이 4천 미터 해저에 있는 타이타닉 석탄창고에서 건져 올린 군밤 크기의 석탄이다. 개당 가격 40달러의 꼬리표가 달려 있는데 약 15분간 지켜보았는데 아무도 사는 관객은 없었다.
이 전시장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타이타닉 침몰에 관여한 세 명의 선장 사진이다. 첫째가 타이타닉 에드워드 스미스(Edward Smith)선장이다. 아주 유능한 엘리트 선장 이였는데 모든 책임은 선장에게 있지만 고향에 큰 동상이 세워 진 것은 영국사회니까 가능했을 것이다. 두번째는 타이타닉 침몰 해역에서 가장 가까운 19.5마일(약 35km)에 잇던 캘리포니아호 스탠리 로드(Load)선장이다. 항해사를 포함한 선교 당직자들이 불꽃을 눈으로 보고 선장에게도 보고하면서도 모두가 타이타닉 조난신호로 인식하지 못했다. 만일 이 배만 조난 현장으로 바로 갔으면 타이타닉 희생자 1515명중 많은 승객들이 구조되었을 것이다.
그가 1961년 사망시까지 39년이란 긴 세월 동안 세상의 비난 속에 살아 온 것을 보면 일말의 동정이 간다. 마지막으로 53마일(97km) 떨어져 있던 카파티아(Carpathia)호 헨리 로스트론(Henry Rostron)선장이다. 높은 수준의 선장 자질과 치밀한 구조 활동으로 구명정에 있던 705명 전원을 카타티아호에 수용했다. 세 명의 선장의 흑백 사진을 보면서 상선선장만도 16년간 바다에서 일한 필자는 만일 같은 상황에 당면했다고 가정했을 때 어느 선장처럼 지휘했을까를 생각 해 본 귀한 기회였다.
시드니의 빌(Bill)
저는 시드니에서 발행되는 한국계 일간지 호주동아에 기고하는 리포터로 로얄 시드니 골프 클럽에서 거행된 1999년 홀덴 호주 오픈 골프를 특집으로 발표했고 그 카피 한 부를 참고로 우송합니다. 본인은 지금 "호주 내륙에 있는 타이타닉 기념비"을 집필 중입니다. 빌 홀씨에 관한 기사가 실린 4년전인 1995년에 수집한 선데이 텔례글래프의 스크랩 된 지면 카피도 오늘 함께 우송합니다.
'기사 내용에서 빌 홀 (Bill Hall)씨가 96세로 시드니 서북부 카스힐 양로원에서 별세한 사실과 그가 11세 때 타이타닉호에서 구조 되고 30세에 호주로 이민 와서 25년간 귀 골프클럽에서 일한 내용을 읽었습니다. 홀씨가 어떤 업무를 담당했는지, 지금도 홀씨와 함께 일한 동료 직원이 귀 클럽에 있는 지를 알고 싶습니다.' 로얄 시드니 골프클럽 행정 비서실로 큰 우편봉투를 보냈다. 산 증언들을 얻어 내여 뒤에 발표할 기회가 오기를 희구한다.
타이타닉 체험관
폭스 영화사의 소유주이자 세계적인 언론 재벌 뉴스 코퍼레이션 회장 루퍼트 머독(Rupert Murdoch)씨가 영화 타이타닉으로 $50억의 영화사상 최대흥행에 성공하자 시드니에 야심적으로 건설한 폭스 스튜디오의 테마 파크 백록(BACKLOT)의 그랜드 오픈식전이 1999년11월7일에 열려 취재를 위해 참석했다. 필자는 30년전 미국 LA에서 할리우드의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구경했다.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유니버설 하면 홍해 물이 갈라지는 영화 "십계"의 장면만은 생생이 기억된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폭스 스튜디오가 앞날에 시드니의 관광명소로 자리잡기를 바라는 맘 때문이다. 다음날도 국제 판매 매니저 세키네씨의 주선으로 폭스 스튜디오를 취재할 수 있었다. 세키네씨는 부인이 한국계라고 소개했고 조금은 한국말도 하였다.
체험관에 들어서자 10여 미터로 축소 제작된 타이타닉호 옆에서 안내양의 "큐(Cue)" 신호에 따라 갑자기 전면의 막이 열리고 미처 상상을 못했던 장면의 전개로 입이 벌어진다. 귀에 익은 배경음악, 타이타닉 선내 크레인은 짐을 올리고, 승객이 된 우리들 일행은 사다리(Gangway)를 따라 승선했다.
D-갑판 3등 선실에서 둥근 현창(舷窓)을 통해 배가 항진하는 것을 보면서 1912년4월14일 밤 11시40분이 된다. 갑자기 타이타닉이 빙산과 충돌하자 배가 흔들리고 바닷물이 선실로 터져 나오고 선원들의 고함소리가 들린다. 우리는 B-갑판으로 유도되어 구명정에 오른다. 우리를 태운 구명정은 본선을 뒤로하고 노를 저어 멀리 떨어진다. 제1 체험관을 나와 제2의 체험관인 기관실로 향했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잭 도슨이 로즈의 손을 잡고 약혼자의 사주를 받은 집사 추적을 피해 우연하게 보일러실에 잠입한 장면을 볼 수 있다. 제2의 체험은 붉은 화염, 수증기, 화부들의 고함소리, 숨막히는 보일러실 이였다. 불이 활활 타는데 침수를 막기 위한 수밀 차단문이 잠기기 직전 화부들이 탈출하는 장면을 기억하며 우리들도 허겁지겁 기관실에서 탈출했다. 정말 현실감 만점의 멋진 체험을 했다. 타이타닉 침몰 체험은 배와 전혀 인연이 없는 남녀노소 관람객들에게 흥미를 안겨주며 직접 동참시켜 뒷맛을 깔끔하게 보여준 폭스 스튜디오의 대표적인 구경 꺼리였다. . 막을 내린 프로그램
1997년 5월 20일 국립해양박물관에서는 타이타닉 특별 전시전이 열려 학술적으로 배울 것이 많았다. 필자도 1981년 1월 신조선 DANE LOCK호 선장으로 덴마크 코펜하겐 B&W 조선소 부두를 떠나 미국을 향해 대서양 횡단의 처녀항해(Maiden Voyage)를 했기 때문에 남달리 감회가 컸다.
98년 1월20일 매년 열리는 시드니 축제의 이벤트로 유럽과 남미등에서 공연한 독일 "극단 타이타닉"이 30미터 길이의 조립식 타이타닉호에서의 공연을 오페라 하우스앞 광장에서 한밤에 구경을 했다. 1999년6월28일 시드니 민방 CH-7에서 11개의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타이타닉 영화가 호주에서 처음으로 방영되었다. 바로 타이타닉 흥행의 막을 내린 프로가 된 셈이다.
영화를 주제로 담은 테마 공원으로 시드니의 명소로 출발한 폭스 스튜디오가 높이 책정한 입장료, 세계적 경기 침체와 관광객 감소등의 여파로 경영에 실패하여 오픈 1년반 만인 2000년 5월에 문을 닫었다. 타이타닉 체험관으로는 훌륭했지만 테마유원지로는 실패작인 모양이다.
에필로그
아내에게는 3시간 14분 영어공부가 된다면서 변명 아닌 핑계를 대며 영화를 5회, 비디오를 6회 빌려와 최소 10여번 보고 또 보았다. 넌픽션 타이타닉의 발표를 위해서는 지금도 당연한 공부였다고 생각한다. 2001년8월3일과 8월8일에 호주동아 3면 교민오피니온란에 필자의 넌픽션 타이타닉이 절반(折半)씩 발표되었다. 원고지 28매의 한 테마의 넌 픽션이 양분되어 있어 당혹(當惑)한 독자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미리 저자와 상의했으면 발표의 기회가 없어지는 한이 있어도 거부했을 것이다. 지면 뒤에 숨겨있어야 할 일이지만 브로컨 힐 취재 3박4일 및 뉴 카슬 취재 비용을 아들이 부담해주었고 5년 동안 자료수집에 공을 쌓은 글이 제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 저자가 자기 글이지만 발표된 글에 대하여 미안했다. 필자의 타이타닉이 2001년8월8일 발표된후 얼마 지나서 호주동아의 경영진과 편집 스� 전원이 바뀌었다. / <호주길따라>에서 펌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