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6-20 프리다 칼로
프리다 칼로, 자기 자신을 출산한 여자
프리다 칼로, 한 세기 분량의 고통
프리다 칼로(1907~1954), “나는 붕괴 그 자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그 압도적인 불운과 절망을 생명에의 열광과 의욕으로 바꾼 여자! “한 세기 분량의 고통이 지속되었다, 거의 이성을 잃을 정도로.”라고 쓸 수밖에 없었던 삶을 피의 격렬함으로 채우며, 죽음이 드리워진 삶을 불꽃 같이 연소하며 산 여자! 프리다 칼로는 생전 파란의 기억들을 드러내는 수많은 그림들과 쉰 다섯 점의 자화상을 남긴 멕시코의 천재 화가다. 그녀는 가녀린 몸으로 32번의 외과수술을 감당하고, 스물 한 살 때 스물 한 살 연상의 남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세 번 임신하고 세 번 유산을 겪었다. 남편 디에고가 자신의 여동생과 바람을 피우는 것을 보고 이혼을 했다가 재결합하기를 되풀이한다. 사람들은 제각각의 방식으로 자기가 처한 비극과 불행을 치러낸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것 앞에 무릎을 꿇고 비참한 생을 살다 간다. 그러나 프리다의 날개는 꺾이지 않는다. 프리다는 “비극은 사람이 가진 가장 우스꽝스러운 것이다”라고 말하며, 파도처럼 연이어 닥쳐오는 불운과 불행에 맞서 아마존의 여성 전사(戰士) 같이 싸운다. 쇠막대가 뼈들을 으깨고 자궁을 뚫고 지나가며 불행의 바닥에 거꾸러진 제 삶을 기어코 일으켜 세웠다. 프리다는 멕시코가 내놓은 걸출한 여성 화가로, 끈질긴 불행과 끔찍한 육체의 고통을 사랑과 행복의 에너지로 바꾸며 자신만의 길로 나아갔다. 프리다의 삶은 한 마디로 피의 여로(旅路), 태양을 향한 춤, 고통의 축제였다!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들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작품은 「벨벳 드레스를 입은 자화상」(1926, 캔버스에 유채, 79.7 x 60 센티미터) )이다. 하얀 이마와 안면을 가르는 경계선, 새가 날개를 펼친 것 같은 굵고 검은 눈썹― 눈썹은 그 형태의 완강함으로 차라리 검은 날개를 양쪽으로 활짝 펼친 새 같다 ―, 그 아래 형형하게 번득이는 검은 눈동자, 기이할 정도로 긴 목, 자주색 벨벳 옷에 감싸인 상체가 이 모든 것들을 떠받친다. 무심히 내려뜨린 왼팔을 놓쳐서는 안 된다. 왼팔은 팔꿈치에서 90도로 꺾여 상반신을 수평으로 가로지른 채 손가락을 활짝 펼친 왼쪽 손등이 오른쪽 가슴 아래께에 놓인다. 다른 그림들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도 프리다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에 두고 있다. 프리다가 즐겨 그린 것은 ‘희생자 여성’이다. 프리다는 13세 때 멕시코 청년 공산당에 입당해 활동한다. 이런 정치적 신념은 프리다가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 프리다는 여성성과 남성성이 배합된 중성적인 인간이다. 불운과 불행들에 유린당했지만 이 자화상 속의 얼굴은 불행을 관조하며 그것들을 의연하게 버텨낸 자의 평온을 보여준다.
프리다가 남긴 일기장이 있다. 나는 우연히 이걸 손에 들고 찬찬히 살펴본다. 빨강, 파랑, 노랑색의 잉크들로 쓰인 단어들, 짧은 문구, 그림, 여러 색의 잉크로 휘갈긴 낙서, 콜라쥬 들이 어지럽게 펼쳐진 일기장. 1947년 11월 7일, 혁명기념일(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 기념일이다)의 일기에 적힌 “디에고 나는 혼자예요.”라는 고백. 몇 년이 흐른 1953년 3월 일기에 “나는 디에고를 사랑한다.”고 적었다. 일기장에는 잉크, 연필,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들, 수채화, 과슈 스케치 등 74점이 실려 있는데, 그때그때 즉흥적인 자기 감정의 표출로 얼룩져 있다. 더러는 무의식의 흐름을 보여주기도 하고, 더러는 자동기술법을 이용한 글쓰기가 맥락없이 산만하게 이어지기도 한다. 프리다에게 일기장은 고통을 노래하는 덧칠한 밭, 검은 수의(壽衣), 감정의 맥동들이 날뛰는 캔버스, 춤추는 실루엣들을 위한 원형 광장이다. 일기의 많은 부분이 단속적인 어절들, 맥락 없이 이어지는 시, 능란한 이야기들로 채워지는데, 이것들을 읽다보면 그녀가 화가이자 매우 뛰어난 직관과 언어감각을 가진 시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자, 범인(凡人)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프리다의 곡절 많은 생애를 천천히 더듬어 보기로 하자.
프리다 칼로의 복잡한 가계(家系)
프리다 칼로는 멕시코 혁명기인 1907년 7월 6일 멕시코시티 교외 지역인 코요아칸의 아옌데 가(街)와 런던 가(街) 사이의 방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계(家系)는 꽤나 복잡하다. 조부모는 헝가리 출신이고, 결혼 뒤 독일로 이주했다. 독일의 바덴바덴에서 여러 자녀들이 태어났는데, 그중의 하나가 아버지 길레르모 칼로이다. 아버지는 1872년 바덴바덴에서 태어나 1891년 멕시코로 이주한 유대계 독일인이다. 그는 멕시코로 이민을 와서 여생을 보냈는데, 여기서 멕시코 여자와 결혼을 했다. 아버지는 본처가 죽자 다른 멕시코 미초아칸 원주민의 혈통으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마틸데 칼데론 곤살레스와 결혼해서 프리다 칼로를 낳았다. “아버지는 본처가 젊은 나이에 죽자 내 어머니, 마틸데 칼데론 곤살레스와 결혼했다. 그녀는 12명의 형제 중 한 명이었다. 내 외조부 안토니오 칼데론은 멕시코 미초아칸 원주민의 혈통이며, 나의 외조모 이사벨 곤살레스는 스페인 장교의 딸이었다.” 아버지는 은판 사진기로 작업을 하는 사진작가였다. 1936년 작품 「나의 조부모, 부모, 그리고 나」(금속판에 유채, 30.7 x 34.5 센티미터)는 프리다의 여러 혈통으로 복잡하게 뒤얽힌 가계도를 잘 보여준다. 화면 정중앙에 결혼예복을 입은 부모를 배치하고, 그 앞에 벌거벗은 여자아이가 서 있다. 이 여자아이의 손에는 부모의 양옆으로 외조부모와 친조부모의 초상이 연결된 탯줄을 상징하는 붉은 색 리본이 쥐어져 있다.
프리다는 여섯 살 때 척추성 소아마비를 앓으며, 아홉 달 동안이나 병상에 누워 있어야만 했다. 오른쪽 다리가 소아마비의 후유증으로 더디게 자라났다. 병약한 오른쪽 다리는 건강한 왼쪽 다리와는 달리 가늘고 쇠약해졌다. 본래 명랑 소녀이던 프리다는 질병의 영향 탓에 자주 우울증을 보이고 폐쇄성 성격으로 바뀐다. 이 무렵 어린 프리다는 가상의 소녀와 강렬한 우정을 경험한다. “당시 내 방의 유리창은 아옌데 가를 향해 나 있었고, 첫 번째 창문에는 김이 서렸다. 거기에 나는 손가락으로 문을 하나 그렸다. 그리고 그 문을 통해 상상 속으로 들어갔다.” 프리다는 이 상상의 세계에서 한 쾌활한 소녀를 만난다. 이 쾌활한 소녀는 소리도 내지 않고 날렵하게 움직였다. 때로는 무게가 전혀 없는 것처럼 춤을 추었다. 프리다는 그 상상 속의 소녀를 졸졸 따라 다녔고, 그녀가 춤을 추는 동안 자신의 비밀스러운 문제들을 털어놓았다. 그 기억은 오래 갔다. 서른네 해가 지난 뒤 프리다는 이렇게 그 시절을 회고했다. “그녀와 얼마나 함께 있었느냐고? 아주 잠깐 동안, 혹은 몇 천 년 동안이었을지도……. 나는 행복했다.”
의사에서 화가에로 꿈을 바꾸다
프리다는 15세 때 의사가 되려고 멕시코 국립예비학교에 들어갔다. 이 국립예비학교 전교생은 2천명에 이르렀는데, 전교생 중 여학생은 35명에 불과했다. 프리다는 국립예비학교에서 남자 친구 아리아스를 사귀었다. 남자 친구는 독서광이고, 프리다는 그에게서 좋은 영향을 받았다. 1925년 9월 17일, 프리다는 끔찍한 사고를 당한다. 이 사고로 프리다는 평생 육체라는 짐을 짊어진 채 삶의 지평을 가로지르는 고통의 족쇄에 채워지고 말았던 것이다. 스페인과의 독립전쟁 기념일이던 그날 오후, 프리다는 남자 친구와 함께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버스가 전차와 충돌했다. 압도적인 불운이 한 소녀의 몸을 덮쳐 한순간에 삼켜버렸다. 전차 내부의 철제 막대가 부러져 튕겨나오며 그 반동으로 프리다의 옆구리를 뚫고 골반을 관통한 뒤 자궁으로 빠져나왔다. 프리다는 고통을 느끼지도 못한 채 몸에서 분수처럼 솟구치는 피를 뒤집어 쓴 채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손써볼 새도 없이 순식간에 커다란 불행이 프리다를 덮쳤지만, 그나마 목숨을 부지할 수는 있었다. 사고의 결과는 참혹했다. 프리다의 골반뼈는 세 동강이 나고, 요추 세 곳, 쇄골과 갈비뼈가 부서졌다. 왼쪽 다리에는 골절이 열한 군데나 있었고, 오른발은 탈구된 채 으깨어졌다. 프리다는 온몸의 살점들은 찢겨 너덜거리고, 뼈들은 부서지고 으깨지는 중상을 입은 채 병원에 후송되었다. 그 뒤 수없이 많은 외과수술을 받아야 했다. 프리다는 소름끼치는 통증을 초인적 인내심으로 참아냈다. 프리다는 1년여 동안 병원에 머물며 척추 교정용 코르셋을 착용한 채 회복을 기다리며 보냈다. 프리다는 이 사고로 인해 의사의 꿈을 접은 뒤 화가가 되기로 한다. 프리다가 몸을 전혀 쓸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어머니는 병상에 부착시킨 특수 이젤을 만들어 주고, 침대 위에 거울을 달아주었다. 프리다는 병상에 부착된 이젤에 캔버스를 올려놓고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캔버스에 담으며 지루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
디에고, 나의 수 천년의 사랑
프리다는 회고하기를 “나는 평생에 걸쳐 두 번 큰 사고를 당했다. 첫 번째는 어린시절에 버스를 타고 가다가 겪은 교통사고이고, 두 번째는 디에고와의 만남이다.” 그만큼 화가 디에고와의 만남은 프리다에게는 불행한 운명을 결정짓는 ‘사고’였다. 프리다는 아버지 같은 화가 디에고 리베라를 만자면서 사랑에 빠졌다. 프리다는 멕시코 교육부 청사 벽화 작업 중이던 디에고를 찾아가는데, 그 당시 프리다의 나이 18세 때였다. “여보세요, 잠깐 사다리에서 내려와 보세요.” 프리다는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화가 디에고에게 자신의 그림 석 점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놀러온 게 아니예요. 나는 먹고 살기 위해 일해야 해요. 그림의 전문가인 당신의 의견을 듣고 싶어요. 허영심으로 그림을 그릴 시간은 없어요. 내가 좋은 화가가 될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 봐 주세요.” 디에고는 프리다의 열정과 재능을 알아보고 그림을 계속 그려보라고 권유했다. 프리다는 디에고의 요청으로 교육부 청사 벽면에 그린 벽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노래」 시리즈 중의 하나인 ‘반란’에 사람들에게 무기를 나눠주는 여성 혁명 전사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졌고, 1929년 8월 21일, 프리다가 스물 한 살 때 디에고 리베라와 결혼한다. 이때 디에고의 나이는 프리다보다 스물 한 살이나 더 많은 마흔 두 살이었다. 이렇게 프리다는 디에고 세 번째 아내가 되었다.
프리다는 디에고에 대해 이렇게 썼다. “매순간, 그는 나의 아이이다. 날 때부터 내 아이, 매순간, 매일, 나의 것이다.” 디에고가 태양이라면 프리다는 그 태양을 바라보고 자라는 나무였다. “당신이 태양인 나무를 목마른 채로 두지 말아요. 당신의 씨앗을 품었던 나무를. ‘디에고’, 사랑의 이름이여.” 그러나 디에고는 프리다를 사랑하면서도 끝없이 달아난다. 프리다는 결혼 이듬해 임신을 하지만 골반 기형으로 인해 유산을 했다. 하지만 디에고를 향한 프리다의 사랑은 항상 뜨겁게 타올랐다. 프리다는 디에고의 열정을, 디에고의 손과 발, 배가 불룩하게 튀어나온 뚱뚱한 몸을, 디에고의 풍부한 상상력과 즉흥적인 행위들을, 디에고가 가진 일체를 아무 조건없이 사랑했다. “그 어떤 것도 당신의 손과 비교할 수 없어요. 그 무엇도 당신의 녹색 눈빛과 비교할 수는 없죠. 내 육체는 매일 당신으로 인해 충만합니다. 당신은 밤의 거울, 맹렬한 섬광, 비옥한 땅입니다. 당신의 품은 나의 쉼터이지요. 내 손끝은 당신의 피를 만집니다. 당신이라는 원천으로부터 움트는 생명을 느끼는 것은 나의 더할 나위없는 즐거움입니다. 그것은 당신으로 채워진 내 모든 신경의 길목에 핀 꽃입니다.” 프리다의 사랑은 거침이 없고, 그 열정은 마를 줄 몰랐다. 프리다는 여전히 디에고를 사랑했다. 두 사람이 결혼한 지 18년째인 1947년 1월 22일 수요일의 일기에 프리다는 이렇게 적었다. “당신은 나의 비 ― 나는 당신의 하늘. 당신은 섬세함, 어린 시절, 삶 ― 아이 ― 노인 ― 어머니와 중심 ― 파란색 ― 부드러움 ― 당신께 나의 우주를 드립니다. 그리고 당신은 내 속에 살아요. 내가 오늘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입니다. 모든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께 숲을 드립니다. 그 숲에는 제가 가진 것 중 가장 좋은 것들이 있는 별장이 있습니다. 당신이 만족하기를 바랍니다. ― 나는 당신이 만족스럽게 살기를 원합니다. 비로 나는 늘 당신에게 터무니없는 외로움과 다채롭지 못한 사랑만을 주지만…….” 프리다는 제 영혼 속에 디에고를 품었다. 그랬기 때문에 이런 문장을 쓸 수 있었던 것이리라. “나는 배아이자, 어린 싹이며, 그것을 낳은 첫 번째 ― 잠재적인 ― 세포다. 나는 가장 오랜 태초부터 ‘그[디에고]’다. 그리고 가장 오래된 세포이다.” 「프리다와 디에고 리베라」(1931년, 캔버스에 유채, 100 x 79 센티미터)라는 작품은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가 나란히 선 모습을 보여준다. 왼쪽의 디에고 리베라는 넉넉한 풍채인데, 푸른색 셔츠에 정장 차림이다. 그의 왼쪽 손에는 팔레트와 붓이 쥐어져 있다. 오른쪽은 디에고 리베라에 견줘 상대적으로 자그마해 보이는 프리다 칼로가 서 있다. 프리다는 두 줄로 된 목걸이를 한 채 발까지 내려오는 녹색의 긴 원피스를 입고 있다. 어깨 전체를 감싸고 허리 아래까지 흘러내린 붉은 스카프가 강렬한 인상이다. 디에고와 프리다는 손을 꼭 잡고 있다. 프리다는 자신에게 건강이 있다면 그에게 모두 주고 싶다고 썼다. 아울러 제 젊음도 모두 그에게 주고 싶다고 썼다. 프리다의 디에고에게 뻗어가는 사랑은 그 무엇으로도 말릴 수가 없었다. 그 사랑은 압도적인 열정과 격렬함으로 채워진 사랑이었다. 프리다는 디에고와 함께 살면서 그에게서 예술적 영감을 빨아들이고 정치적으로도 영향을 받았다. 프리다는 ‘공산주의 청년동맹’에 가입한 상태였지만, 정치와 공산주의에 더 깊숙이 관여했다. 프리다는 침대 맡에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의 초상 사진들을 붙여놓고 날마다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프리다의 진짜 자아는 광기라는 커튼 뒤에 숨어 있다. 프리다는 고요한 삶을 꿈꾸면서도 동시에 번개, 고통, 태양들을 품었다. 프리다가 하고 싶은 일들은 꽃을 다듬기, 그림 그리기, 디에고와 침대에서 종일 사랑나누기, 그리고 부드러움, 제 어리석음의 넓이를 비웃기 따위다. 프리다의 허리를 주체할 수 없는 성욕과 끔찍한 고통이 뱀 두 마리처럼 휘감고 있었다. 1951년 11월 9일자 일기에 이렇게 적는다. “소년 ― 사랑. 정밀과학. 계속 삶을 인내하면서, 진정한 기쁨 속에서 살고 싶다. 무한한 감사의 마음. 손 안의 눈과 시선의 촉감. 청결함과 사랑스런 싱싱함. 전(全) 인류 체계를 지탱하는 거대한 척추. 이제 우리는 목도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배울 것이다. 항상 새로운 것이 있다는 것을. 항상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날개가 있는 나의 ― 디에고, 나의 수 천년의 사랑.”
디에고의 외도와 프리다의 고통
1933년 프리다는 디에고와 함께 뉴욕으로 이주했다. 프리다 부부는 4년 간의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멕시코로 돌아오는데, 그 무렵 남편 디에고가 자신의 여동생 크리스티나와 불륜에 빠진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일로 인해 프리다는 크게 상처를 받고 낙담했으며, 그림마저도 손에 놓아버렸다. 1940년대로 접어들면서 프리다는 여러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고, 화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다른 한편으로 개인적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1941년 프리다는 아버지가 죽고 비통한 슬픔에 잠긴 가운데 미국 보스톤에서 열린 현대 멕시코 화가전에 작품을 보낸다. 이 시기에 그린 작품들, 「뿌리」(1943년, 금속판 유채, 54.9 x 89.8 센티미터), 「부러진 척추」(1944년, 캔버스에 유채, 40 x 30.5 센티미터), 「작은 사슴」(1946년, 캔버스에 유채, 22.4 x 30 센티미터) 등등을 통해 프리다의 내면을 엿볼 수가 있다. 「뿌리」는 멕시코의 거칠고 광활한 대지 위에 비스듬히 누운 여자를 묘사한다. 대지 위로 흘러내리는 검고 탐스러운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이 그림 속의 여자는 프리다 자신이다. 여자의 심장이 있는 가슴 부분이 열린 채 녹색 식물이 여자의 몸과 대지를 휘감으며 줄기를 뻗어내는데, 그 줄기 끝에는 잎사귀들이 무성하다. 대지를 덮고 있는 짙은 녹색의 잎사귀를 보면 잎맥들에서 뻗친 붉은 실핏줄들이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으로 프리다는 제 존재의 근원이 멕시코의 대지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부러진 척추」는 프리다가 겪은 끔찍한 사고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프리다는 벌거벗은 상반신을 드러내는데, 목에서 하반신까지 갈라져 그 내부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 절개된 틈을 통해 여기저기 부서진 이오니아식 기둥이 몸을 수직으로 떠받치고 있는 걸 보여준다. 척추가 망가진 몸은 정형외과용 코르셋으로 조여진 채 지탱하고 있고, 얼굴과 몸통에는 작은 못들이 무수히 박혀 있다. 프리다의 눈에서는 하얀 눈물이 점점이 흐르고 있다. 「작은 사슴」은 좌우 양쪽에 회랑의 열주(列柱) 같이 아름드리 나무들이 서 있고 그 중심에 쫓기는 사슴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몸통은 사슴의 형상이고, 얼굴은 프리다의 것이다. 이 작은 사슴의 목과 등에는 화살 아홉 개가 박혀 있다. 이렇듯 프리다는 그림을 통해 제 몸에 새겨진 상처들과 생이 감당하는 고통의 실상을 드러낸다. 그리고 산다는 것은 그 상처와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지난한 제의(祭儀)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1949년 디에고는 또 다시 바람을 피워 프리다를 낙담하게 만든다. 이번 외도의 상대는 프리다의 친구이자 디에고의 모델이 되었던 마리아 펠렉스라는 유명한 영화배우다. 디에고의는 마리아와 외도를 하고 미국으로 밀월 여행을 다녀오기도 한다. 이 무렵 그린 「디에고와 나」(1949년, 캔버스에 유채, 29.5 x 22 센티미터)는 디에고의 외도로 말미암은 프리다의 절망과 슬픔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 자화상의 특이점은 프리다의 검은 갈매기가 양 날개를 펼친 듯한 검은 눈썹 위 미간에 디에고의 초상을 그려넣은 점이다. 디에고의 이마 한가운데에는 눈동자 하나가 더 있다. 프리다의 표정은 디에고를 향한 분노와 상심 때문에 웃음 한 점 없이 경직되어 있다. 프리다의 커다란 양쪽 눈에서는 눈물 두어 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디에고의 외도에 대한 분노가 프리다의 방황으로 나타나는데 가운데, 프리다는 제 본성 깊이 감추어져 있던 양성애적 성향을 자각한다. 여자들과 염문을 뿌리며 외도를 일삼는 디에고에 맞서 프리다도 정부를 여럿 두었다. 프리다는 남성들보다 여성들과 더 자주 사랑에 빠졌다. 프리다와 동성 연애 관계를 거친 여성들로 일본계 미국인 조각가 이사무 노구치, 스페인의 공화주의자였던 익명의 여성 화가들을 꼽을 수 있다. 1937년 레온 트로츠키 부부가 오랜 망명생활 끝에 멕시코에 도착했을 때 디에고는 이들 부부를 자신의 푸른집에 머물게 했다. 이때 프리다는 트로츠키와 짧은 연애를 나누고, 그에게 「레온 트로츠키에게 헌정하는 자화상」을 그려 선물로 주었다. 이 그림에서 프리다는 공단 드레스를 입고 어깨에는 숄을 걸치고 있는데, 프리다는 트로츠키에게 바치는 편지와 꽃다발을 들고 있는 것으로 트로츠키를 향한 프리다의 마음을 살짝 엿보게 한다.
프리다는 디에고의 외도와 불성실함에 크게 낙담하고 이혼을 결심하는데, 이때 프리다는 “우리의 이혼에는 어떤 감정이나 경제적인 것, 예술적인 갈등 따위는 없다.”라고 했다. 프리다는 우울증에 사로잡혀 날마다 술을 마시지 않고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주로 코냑을 마셨는데, 날마다 마시는 코냑이 한 병에서 두 병으로 늘어난다. 그림을 향한 열망은 더 커졌지만, 잦은 음주와 불규칙한 생활로 인해 건강은 더욱 나빠졌다. 디에고와 이혼하고 여섯 달 동안 긴 여행을 마치고 푸른집으로 돌아온다. 그즈음 트로츠키가 피살당했다는 비보가 날아든다. 쇠약해진 몸에 큰 충격과 슬픔을 준 트로츠키의 피살 소식으로 프리다는 최악의 상태에 이르러 병원에 입원한다. 프리다는 재결합을 원하는 디에고의 요구를 받아들여 다시 함께 산다. 프리다는 디에고에게 재결합을 위해 두 가지 조건을 내건다. 하나는 재정적 독립이고, 다른 하나는 성관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디에고의 생일이 들어있는 12월에 재결합을 하고 새로운 출발을 위한 결혼식을 올린다.
발이 왜 필요하지? 내게는 날개가 있는데
1950년대로 접어들면서 프리다는 또 다른 불행과 직면한다. 1953년 프리다는 오른발에 회저병이 생긴 것을 알았다. 프리다는 서서히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1953년 4월 프리다의 건강 상태가 심각해지자 서둘러 멕시코 미술협회가 주관하는 프리다의 회고 전시회를 기획한다. 프리다는 거동을 할 수 없어서 구급차를 타고 침대에 누운 채 전시회에 참석한다. 이 전시회는 멕시코에서 크게 화제를 모았다. 언론들은 프리다 전시회를 크게 소개했고, 전시회에는 관람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전시가 끝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7월 27일, 영국병원에서 입원해 오른쪽 다리를 무릎까지 절단하는 수술을 받는다. 그 절단 수술 뒤 의사가 권한 심리치료의 일환으로 자신의 발을 그렸다. 그때 프리다의 그림 속에서 발은 피가 위로 솟구치고, 엄지 발가락 일부는 절단되어 있는 걸 볼 수 있다. 화면 전체에 발의 모습과 함께 보행자, 발레리나, 건강한 평화, 혁명, 스탈린 만세, 디에고 만세 따위의 글자들이 거친 필체로 적혀 있다. 프리다는 발가락 절단 수술만 받은 게 아니고, 골수 이식을 수술을 받다가 세균 감염으로 재수술을 받았다. “나는 일년을 앓았다. 일곱 번의 척추수술. 파릴 박사가 나를 살렸다. 그는 나에게 삶의 기쁨을 되돌려 주었다. 아직 휠체어에 앉아 있다. 언제 다시 걸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나는 석고로 된 코르셋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나를 무시무시한 양철 깡통으로 만들지만, 척추를 지탱하는데 도움을 준다. 통증은 없다. 단지 만취한 듯한 피로가, 그리고 당연하게도 매우 자주 절망이 찾아온다. 절망은 그 어떤 단어로도 정의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고 싶다. 벌써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파릴 박사에게 선물할 작은 그림이며, 그를 위해, 모든 정성을 담아 그리고 있다. 나는 내 그림에 욕심이 많다. 무엇보다도 내 그림을 공산주의 혁명에 쓸모있는 무언가로 바꾸고 싶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는 내 모습을 정직하게 그린 적이 없다. 내 그림이 당에 이바지한 바도 없다. 내게 허락된 건강 상의 긍정적인 요소 하나하나까지 혁명에 기여할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해 싸워야만 한다. 살아야 할 진짜 이유.” 프리다는 디에고를 사랑하고,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 그리고 마오쩌둥의 유물론적 변증법을 신봉한다. 프리다는 자신이 공산주의 사회라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전망을 하나의 이상으로 품었으며, 공산주의 혁명 운동의 무조건적 동맹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프리다는 한쪽 다리를 절단한 뒤에도 일기장에 “발이 왜 필요하지? 내게는 날아다닐 날개가 있는데.”라고 적었다. 그만큼 정신적으로 꿋꿋하고 의연하게 고통과 불행들을 버텨내고 있었다. 하지만 1954년으로 접어들며 프리다의 상태는 더욱 나빠졌다. 프리다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가 없을 정도로 종일 끔찍한 통증에 시달리다가 다량의 약물을 삼켜야만 했다. 프리다는 이 괴로움을 끝낼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1954년 4월, 모든 고통과 불행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기도하지만 실패로 끝나고 만다. 그리고 석 달이 지난 1954년 7월 13일, 프리다는 집에서 조용히 눈을 감는다. 프리다는 47년 동안 불행으로 얼룩진 생애를 끝낸다. 프리다는 죽기 전날 디에고와의 결혼 25주년을 기념해 사둔 반지를 남편에게 주었다. 이것은 사랑하는 이들이 치른 일종의 작별 의식이었다. 프리다는 디에고를 사랑이 가득 담긴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 때문에 울지 말아요! 그래요, 당신 때문에 울어요!” 프리다는 일기장의 마지막에 “행복한 퇴장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썼다. 프리다가 누운 관은 뚜껑 없이 별과 낫, 망치가 그려진 붉은 기로 덮여 있었다. 관은 그 상태로 화장장으로 옮겨지고, 디에고는 그 장례 절차를 침울한 가운데 지켜봤다.
'책상서랍'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홍범 (0) | 2017.05.22 |
---|---|
[스크랩] 1주일 만에 효과 보는 세계 최고의 공부법 (0) | 2016.12.20 |
천연 핸드메이드 모기약 (0) | 2016.06.11 |
에셔 (0) | 2016.02.19 |
들꽃 (0) | 2015.05.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