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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름을울

가라, 어느덧 황혼이다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 / 기형도

 
                                 가라, 어느덧 황혼이다 
                                 살아 있음도 살아 있지 않음도 이제는 용서할 때 
                                 구름이여, 지우다 만 어느 창백한 생애여 
                                 서럽지 않구나 어차피 우린 
                                 잠시 늦게 타다 푸시시 꺼질 
                                 몇 점 노을이었다 
                                 이제는 남은 햇빛 두어 폭마저 
                                 밤의 굵은 타래에 참혹히 감겨들고 
                                 곧 어둠 뒤편에선 스산한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우리는 그리고 차가운 풀섶 위에 
                                 맑은 눈물 몇 잎을 뿌리면서 落下(낙하)하리라 
                                그래도 바람은 불고 어둠 속에서 
                                밤이슬 몇 알을 낚고 있는 흰 꽃들의 흔들림! 
                                가라, 구름이여,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해 
                                이제는 어둠 속에서 빈 몸으로 일어서야 할 때 
                                그 후에 별이 지고 세상에 새벽이 뜨면 
                                아아,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 우리는 
                                서로 등을 떠밀며 피어오르는 맑은 안개더미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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